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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함과 숭고함이 맞부딪히는 섬광
이선영 (미술평론가) 2011

 

녹슬고 연마되어 조성된 빛과 어둠 사이로 드러나는 대상은 흩어진 머리칼과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다. 작가의 작품 속 아름다운 그녀는 분명히 욕망의 대상으로서 호출된 여성이지만, 육중한 철판에 새겨진 이미지, 관객을 압도하는 거대한 크기, 촛불이 동원한 제의적인 분위기 속의 여성은 사랑과 욕망에 얽힌 간단치 않은 상징(icon)으로 다가온다. 매혹과 불길함을 동시에 품고 있는 작가의 작품 속 여성은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반영하는 소재이자 주제이다. 그러나 사랑에 내포되기 마련인 트라우마는 개인사적 내용을 보편화시킨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그 양태가 어떻게 나타나든, 인간이란 존재가 사물이나 동물이 아니라는 극적인 증거이며, 그리하여 예술의 가장 내밀한 몸통을 이루어왔다. 자신의 전 존재를 끌어당기며 몰두하게 하지만 쉽게 잡히지 않으며, 희열의 순간 이면에 끝없는 갈증과 박탈감을 낳는 예술 자체가 사랑의 과정과 다를 바 없다. 작가의 작품은 자신을 끊임없이 선동하는 그 문제적 대상과 대결하는 피 튀기는 전장처럼 보인다. 이 전쟁에서 승리는 처절한 상흔을 아름다운 무늬로 고양시키기도 한다.

 

젊은 남성에게 여성은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지만, 좋아해도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여성은 애증에 찬 존재이다. 작품은 그녀를 소유하는 자기 나름의 방식이다. 작가의 작품 속 여성은 실제 그가 사랑했던 이부터 단순한 모델에 이르지만, 그녀들이 다루어지는 방식은 유사하다. 이미지의 원천인 사진은 대개 누운 여자 위에서 찍은 시점을 내포한다. 작품 [상처](2008-2009) 시리즈는 침대에 누운 채 플래시 세례를 받는 여성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그녀는 눈을 감거나 가리고 있으며, 카메라-눈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다. 손수 찍은 사진은 컴퓨터상에서 재구성되어 사용된다. 이미지가 각인되는 곳은 견고한 철판이다. 철판은 자연 상태로 몇 주간 부식된 후 샌드페이퍼로 연마되어 빛과 어둠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장이 된다. 녹슨 철판에 전사된 이미지에 흑연 안료나 유성 미디엄으로 강약과 질감을 조성하며, 때로는 거칠게 긁어내기도 한다. 조각과 판화, 회화의 여러 단계를 거치는 복잡한 작업과정은 작가를 피학자의 위치에 놓지만, 그렇게 완성된 여성 이미지의 주체인 작가는 가학자로 변모한다.

 

흑연이나 녹 가루 등으로 범벅된 거대한 상처 같은 여성은 자동차 도료로 최종 마감하여 고착시킨다.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상처를 아물게도 하는 시간은 봉인된다. 그러나 봉인이 갈등의 원천적 해결은 아니기에 행위는 반복된다. 그것은 몇 년간에 걸친 작가의 작품이 시리즈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사랑을 추동하는 욕망 자체가 반복(과 차이)의 리듬을 탄다. 욕망의 대상인 여성은 춤을 추듯이 율동감 있게 배열되기도 한다. 율동은 과도하게 흘러 이상하게 경직된 시체 같은 모습도 보인다. 여성은 살아 숨 쉬는 신체에서 박제된 시체에 이르는 다양한 계열을 가진다. 그의 작품은 비슷한 도상과 구성으로 인해 독립된 그림들 간에 잠재적 움직임이 있다. 여성은 죽은 듯이 가만히 있을 경우에도 머리칼은 자율적으로 움직인다. 머리칼은 불타오르듯이, 또는 물에 풀어지듯이 넘실댄다. 그녀의 의지와 무관하게 욕망은 꿈틀거리며 상대를 향해 유혹의 촉수를 뻗친다. 작품 [embrace all ; light-cut myself](2009)에서 여성은 모든 이를 다 안아 줄듯 포용적 자세를 가지지만, 발끝에 튀는 피와 사방으로 뻗친 머리칼은 죽음의 춤을 추는 듯하다. 인간을 끝없이 자극함으로서 고갈시키는 욕망은 죽음과 밀접하다.

 

작가의 작품에서 여성-욕망-사랑-죽음은 꼬리를 무는 연쇄 망을 이룬다. 죽음에 이르는 사랑, 또는 사랑으로부터 비롯된 파멸, 이 오래되고도 늘상 새로운 연결의 고리를 이루는 것은 표상 불가능한 타자로서의 여성이다. 문명 보다는 자연에 속한 작가의 작품 속 여성도 어둠의 대륙이나 심연에 놓여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기표란 언제나 의미, 의사소통, 또는 구조인데 비하여, 여성은 문화를 자연으로, 화자를 생물학으로 변질시키는 이상야릇한 주름이라고 말한다. 작품 속, 어둠에 반쯤 잠겨진 여성은 기표가 포섭할 수 없는 이질성을 표출한다. 상상적인 면에서 여성의 욕망은 죽음에 더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생명의 모태와 파괴의 원천이 같기 때문이다. 여성은 모태이며 동시에 무덤이며, 상실로부터 치명적인 위험으로 나타난다. 수면이나 죽음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감금이나 봉인은 이러한 위험에 직면해 취해진 조치이지만, 이러한 조치들이 헐거워지면 언제든지 강력하게 튕겨나가려는 욕망의 전 단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단계는 욕망을 모두 소진해 버린 나른한 모습과도 중첩된다.

 

욕망과 죽음의 이러한 연결 때문에 고대의 쾌락주의자들로부터 연원한 사랑에 대한 회의론이 설득력이 있었다. 장 살렘의 [고대 원자론]의 논지에 의하면, 원자론자들을 비롯한 고대 쾌락주의자들에게 사랑은 무제한적인 정념의 유형 자체이며 사람들은 정념에 눈이 멀어버린다는 점에서 무절제하다고 판단되었다. 그것은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격한 욕망으로 가슴이 더 불타게 되는 유일한 경우로, 사랑은 소유한 순간조차 사랑하는 이들의 병적인 격정은 전혀 고정되지 않는다. 사랑이란 어느 것도 그것을 한정할 수 없고, 어떤 것도 그것을 제한할 수 없는, 한마디로 자제하기 힘든 무수한 욕망들의 사례라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쾌락주의자들(=현자)은 소외를 낳는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결론이다. 신의 사랑이 지배하던 중세를 건너 뛴 근대적 사랑의 색채는 더욱 어둡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모더니즘의 대변자인 보들레르에게 사랑은 죽음의 이면일 뿐 아니라, 죽음에 의지하고 있다고 본다. 때늦은 낭만주의이자 미적 종교의 사도인 세기말 상징주의 회화에서, 죽음의 품안에서 아름다운 그녀들이 너무나 많이 등장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죽은 여인은 향수로서의 향락이다. 그녀는 손에 닿을 수 있지만 영원히 상실된 불가능한 존재이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여자(타자, 대상)는 죽은 후의 사랑인 최고의 결정 작용 속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 소멸되는데, 죽은 후의 사랑 속에서 작가는 그녀를 소유하고, 그녀 너머로 자신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의 전능성을 투영한다. 작가의 최근 작품 속 메두사나 오필리아의 모티브는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소유하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불길한 여인들이다. 작가는 여성적인 열정을 소유(지배)할 수 없어서 그 열정이 될 것이다. 죽음의 충동이 약호화 된 작품 속 사랑은 에로스의 이면인 타나토스이다. 여인들은 타나토스의 기호들 사이에서 떠돈다. 여성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누워있으며, 작가는 시선을 통해 사랑하는 여인을 흡수한다. 사랑하는 대상의 이러한 시각적 흡수는 그 대상의 파괴이자 대상에 대한 복종이다. 사랑은 정확한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거기에는 보는 사람의 환상, 시선만이 있을 뿐이다. 욕망의 시선은 대상의 포획에 계속 실패하며, 그 때문에 도상들은 계속 반복된다.

 

작가의 작품에는 욕망하는 주체, 즉 결여의 주체가 똬리를 틀고 있다. 작품 속에서 구애되는 여성의 실재적 실체가 비워져 있다. 라깡은 ‘예술적 창조란 내가 오직 끔찍한 것으로, 비인간적인 파트너로서만 묘사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정립함에 있다’고 말한다. 라깡은 이러한 고문과 고통의 정화를 통해 주체성이 탄생한다고 본다. 대상의 부재를 공언하는 사랑에 대한 라깡주의적 해석은 진정한 관계의 결핍을 보충하려는 집요한 공략을 낳는다. 라깡은 재현과 사물 그 자체 사이의 조그만 차이가 실재를 구성한다고 보지만, 그 실재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서, 사랑을 텅 빈 것으로 만든다. 미란 보조비치는 [암흑지점]에서 라깡적 관점에서 사랑을 해석한다. 라깡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자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지만, 자신이 결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사랑하는 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은 사랑받는 자의 내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불일치에서 사랑의 드라마는 생겨난다. 여기에서 사랑의 내재적 원인을 포함하는 대상은 현실에서 결코 조우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유한한 대상은 그것이 근원적으로 상실된 대상과 맺고 있는 어떤 우연적이고 부분적인 유사성 때문에 사랑받는 것일 뿐이다. 이 상실된 대상이 라깡이 말하는 ‘대상a’이다. 라깡적 논리에 의하면, 신을 제외하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그 자체로 사랑하지 않는다. 타자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그의 사랑의 진정한, 하지만 상실되고 접근 불가능한 대상과 연계시키는 환유적 유대 때문이다. 실재의 불가능성에 인간적 사랑의 비극이 존재한다. 작가의 작품에서 비극은 보다 자극적이다. 그가 인용하는 울프의 시 [상처]처럼, 작품은 ‘칼로 도려 선혈 낭자한 기억 위에 너를 새기는’ 과정이다. 시처럼 작가는 ‘타오르는 불길 속에/ 열리지 않는 자물쇠로/ 너를 가둔다’, ‘저주받은 운명이 다하는/ 영겁의 시간까지’...그녀는 도발하지만 충족시켜주지 않기 때문에 죽음의 의식으로 심판받는다. 피와 정액을 연상시키는 작품 표면의 붉고 반투명한 흐름들은 폭력 또는 무위로 해결된 욕망의 흔적들로 끈적거린다. 작가의 작품에서 죽음의 이미지는 작품 [상처](2008)처럼 죽은 듯이 누운 자세부터 작품 [love-ecstasy](the coffin of medusa)(2008-2009)처럼 좁은 관에 갇혀 있는 이미지에 이른다.

 

많은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바탕의 무늬는 살아있는 것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쇠락의 징후처럼 보인다. 그것은 원죄적 존재에게 찍힌 낙인 같은 것이다. 작가는 이 무늬가 여성이 누워있는 이불의 무늬라고 밝히는데, 여기에는 무의식적이나마 성과 죽음의 연결고리가 있다. 작품 [ophelia](2011)는 꽃다발이 몸에 던져지고 꽃이 액체화 된다. 여기에서 국화꽃은 죽음의 상징이다. 꽃다발처럼 분출된 욕망은 제 갈 곳을 못 찾고 거품처럼 공중에 흩어져 버린다. 욕망이 흐르는 궤도가 명확해지기 위해 여성은 어떤 식으로든 고정되어야 한다. 그녀들은 보이는/보이지 않는 구속 장치에 갇힌다. 허연 점액질에 뒤범벅이 된 채 눈을 감은 [ophelia-1](2010)은 [ophelia-3](2010)에 이르면 못이 박힌 틀에 갇힌다. 화면 위에도 철 못이나 볼트가 박혀있어 봉인은 여러 차원에서 집요하게 이루어진다. 때때로 여자는 메두사 같은 눈길로 상대를 굳게 한다. 메두사 버전의 여성 머리칼은 화면 속에서 더욱 비중이 높으며, 그 한계를 모른 채 활개 친다. 메두사는 매혹과 잔인함을 동시에 갖춘 요부(femme fatal)의 전형이다.

 

여자들이 눈을 감음으로서 다루어지기 쉬운 상태, 요컨대 소유된 상태에 놓여있다면 메두사의 시퍼렇게 뜬 눈은 대상이 주체가 된 상태로 보는 이를 꼼짝 못하게 포박한다. 메두사의 시선에 내포된 거세 공포는 2010년의 [light-cut myself] 시리즈와 연결된다. 화면 속 여성은 빛의 칼날 앞에 놓여 있지만, 베어지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다. [light-cut myself] 시리즈에서 머리카락이 흩어진 여성 목 부분에서 시작되는 빛의 끝자락에 핏자국이 있다. 피와 정액 같은 체액의 범람 속에 스치는 섬광은 죽음에 이르는 희열을 보여준다. 화면 속 여성은 체액에 침수, 또는 빛의 칼에 참수된다. 동시에 그것은 화면 밖 남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 시리즈에 대해 작가는 ‘여자를 보는 시선에 대한 반향’이라고 밝힌다. [light-cut myself]는 죽음에 이르는 욕망을 베어내려 한다. 욕망의 대상을 희생시키는 행위에는 고대 희생제의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미지나 설치에 등장하는 촛불은 제의적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러한 제의적 분위기는 200호를 넘는 압도적인 스케일에 힘입은 바 크다. 그것은 종교에서부터 현대의 하위문화를 관통하는 몰입의 체험과도 연결된다.

 

작품[candlelight](2009) 시리즈는 주변을 어둡게 하여 촛불의 존재 의미를 밝히기도 하고, 녹슨 판 가운데서 갈아낸 부분을 타오르는 빛의 영역으로 만들기도 한다. 작품 [gathering rays of light into a focus](2009)에서는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여자를 촛불 이미지로 만든 틀이 감싸고 있다. 작가는 ‘촛불이 지닌 빛의 이원성은 여성성과 닮은꼴’이라고 말한다. 위를 향해 타오르면서도 아래로 흘러내리는 허물어지는 흔적은 몸(=정신)의 고양과 쇠락을 동시에 포함한다. 이러한 이원성은 성스러움과 불경, 숭고와 비천을 넘나드는 성의 이미지부터, 여성을 마리아(순결, 생명)와 이브(불경, 죽음)로 나누는 이분법 속에 선명하다. 작가의 작품 속 여성은 신비하지만 신비에는 몽매에서 야기되는 억압부터 민주주의적 이성을 초월하는 이상까지 극과 극의 계열로 펼쳐져 있다. 악역이든 아니든, 여신 같은 이미지가 있기도 한 작품 속 여성은 ‘오직 완전한 어둠만이 빛과 유사하다’(바타유)는 종교적 관능성까지 내포한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논리를 펴는 바타유의 관능적 체험에서, 죄의 논리를 끝까지 수용하고 그 내적 붕괴로 이끌어가는 카톨릭적 경향을 발견한다.

 

빛과 어둠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 의미론적 영역을 다루는 작가의 작품 속 여성은 이러한 맥락에서 불경과 신성함을 오간다. 무한과 허무는 그 끝자락에서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에게 사랑의 숭고함이란 비천함(abjection)이라고 불렀던 그 비(非)주체 비(非)객체이다. 작가의 작품 속 섬광은 사랑의 기반인 숭고함과 비천함이 극적으로 조우하는 지점을 표현한다. 숭고함과 비천함, 무한과 공허 사이에 놓인 사랑은 경계와 금기를 넘나든다는 점에서 두려움이 깔려 있다. 기괴하게 번쩍이는 반사면을 포함한, 모노톤의 어두운 작품들이 담그고 있는 또 하나의 정서는 멜랑콜리이다. 크리스테바는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우울증 환자는 성애적 대상이 선동하는 불안에 대해서 자신을 방어한다고 본다. 우울증 환자는 에로스를 참지 못하고, 타나토스로 인도하는 부정적 나르시시즘의 경계에 이르려 한다. 그러한 점에서 멜랑콜리는 열렬한 사랑의 어두운 이면이다. 그것은 무(無)와 죽음의 약속처럼, 언제나 다른 곳에 있는 불가능한 사랑과의 결합이다. 사랑의 대상이 새겨진 바탕은 견고한 금속성과 그것의 산화된 상태인데, 그 딱딱한 무기물은 사랑의 충동 이면에 도사린 죽음을 상징한다.

 

사랑의 충동과 죽음의 충동은 동렬에 놓여 서로의 꼬리를 문다. 죽음은 심연과 같은 신비를 내포한다. 작가의 작품이 가지는 모노톤의 어두운 색조는 대상을 침수, 또는 용해시킨다. 땡땡이 무늬가 연상시키는 병적 징후, 녹슨 자국들이 연상시키는 물질의 부패 속에서 여성들은 시간도 공간도 알 수 없는 심연 속에 잠겨있다. [검은 태양]은 다양한 성도착이 마치 우울증적 부인의 다른 면처럼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거기에는 꿈꾸던, 욕망하던, 생각까지 했지만 고백할 수 없고 영원히 불가능한 변태적 성욕, 즉 음울한 향락이 있다. 한숨과 외침은 향락을 내포한다. 계속해서 크리스테바는 멜랑콜리 환자의 도피가 이러한 에로티시즘과 마주한 위험을 피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명명된 성적 욕망은 주체가 타자에 이르는 균형을 보장하고, 결과적으로 삶의 의미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외롭게, 그리고 위태롭게 타오르는 촛불은 멜랑콜리의 극적인 이미지이다. 작가는 촛불이 ‘여성생식기의 실루엣과도 닮았으며’, 그 성질은 ‘사랑할 때의 인간의 모습과도 아주 흡사하다’고 본다. 그것은 어둠 속의 빛이지만, 죽음으로서 사는 역설적 존재이다. 그것은 순간과 영원을 결합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소유하려는 순간 꺼지고 상처를 남긴다. 작업 과정이나 이미지에서, 산화시키고 뿌리고 태우고 갈아내는 행위에는 성스러움에 이르는 무한한 소모의 과정이 내포되어 있다. 작가의 작품에서 밝음과 어둠은 그 끝자락에서 조우한다.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밝음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동렬에 놓인다. 그의 작품에서 감미로운 사랑은 긴장과 불안을 낳는다. 사랑은 동일자가 타자와 만나는 극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타자와의 만남은 경계의 와해를 요구하고 이는 행복과 불행의 동시적 원천이 된다. 크리스테바는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의 격정 속에서 개개인의 정체성의 한계는 철폐된다고 본다. 그녀에 의하면 사랑은 나를 열광케 하며 아울러 나를 초월하거나 나의 한계를 넘어선다. 사랑이란 내가 나에게 비범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시간이자 공간이다. 여기에서 나는 개체가 아니라 군주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융합을 통해 초인적인 정신현상의 무한한 공간 같은 것이 된다. 사랑 속에서 나는 주관성의 절정에 서있게 된다.

 

그러나 사랑은 고독하다. 작가의 작품 속 여성처럼 애매하고, 촛불처럼 사라지기 쉽다. 그래서 많은 현대의 정신분석학자들은 사랑의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다. 그들에 의하면 사랑의 대상은 없거나 영원히 오지 않는다. 불길하거나 불가능한 대상이 출몰하는 작가의 작품은 부재하는 이를 느끼기 위한 방편이며 불확실한 대상을 붙잡아 놓는 방식이다. 작가에게 작품과 작품 속 여성은 동일한 것이 된다. 명명(소유)하기 불가능한 것을 명명(소유)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작업과 같은 것이다. 알랭 바디우가 [사랑예찬]에서 비판한바 있는 회의주의자들처럼, 사랑이 결국 종의 영속을 위한 하나의 술수이자 기득권을 확고히 물려받기 위한 사회적 계략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간주한다면, 사랑은 결코 예술의 진지한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회의주의자들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욕망의 미사여구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유하게 존재하는 것은 바로 욕망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사랑은 단지 성적 욕망에 들러붙어 있는 하나의 상상적 구성일 뿐이라고 가볍게 정리해 버린다. 이렇듯 알랭 바디우가 진정한 사랑의 적대자들이라고 지적하는 ‘자유주의적 개념’은 사랑이란 쓸데없는 위험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소비의 달콤함 속에서 속행될 준비된 부부의 속성을, 다른 한편으로는 열정을 절약하면서 쾌락으로 채워진 즐거운 성적 타협을 소유할 수 있다는 논리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현실과 양립할 수 있는 이러한 간편한 결론을 거부하는 이들 중의 하나는 지배적 체제의 타자라고 할 수 있는 예술가들이다. 작가의 작품에서 사랑은 ‘남녀의 상호이익이 동반되는 시스템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유로운 두 개인 사이의 계약’(알랭 바디우)같은 손쉽게 처리될 수 있는 항목이 아니라, 삶에 그 밀도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에게 사랑은 ‘차이의 창조적 놀이’(알랭 바디우)이자, 하나의 사유이다. 플라톤의 [국가]가 말하듯이,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은 결코 철학에 이르지 못할 것’(소크라테스)이라면, 예술에 이르는 길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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