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성을 잇는 근본적 자리
이선영 (미술평론가) 2014

 

두 가지 글자체로 구별한 ‘사원(私院) 혹은 사원(寺院)’이라는 전시부제 아래 전시장 자체를 작은 사원처럼 꾸며놓은 조현익전은 종교적인 것을 전면에 놓는다. 그가 종교적인 인간이기는 하지만, 특정 종교를 가진 이는 아니기에 이러한 시도는 종교적인 것에 대한 지향인지, 저항인지 알 수 없다. 아마 전자에 가깝겠지만, 이를 위해 동원된 도상들이 성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가장 눈에 띄는 남녀교합상이 티베트 밀교에 이미 있는 전통적인 도상이라 할지라도, 포르노그래피를 비롯한 각종 싸구려 복제품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는 면모는 상스럽기까지 하다. 그는 종교의 바탕을 이루는 성스러움 그 자체가 아니라, 성/속을 가르는 금기를 위반함으로써 생겨나는 또 다른 ‘내밀하고도 절대적인 경지’(바타유)를 향한다. 이 내밀하고도 절대적인 경지는 종교적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라면, 정통적이거나 제도적인 종교, 특히 교리 중심의 그것이 아니라, 이단시되었던 종교, 가령 신비주의나 제도의 매개를 거치지 않는 개인적인 차원의 종교, 그리고 육체의 희열과도 명백히 구별할 수 없는 강렬한 감성에 기대는 종교일 것이다.

 

사실 이 후자만이 예술과 내재적인 관련을 가진다. 자연과 무의식을 포함한 모든 차원이 코드화되어 낱낱이 가격이 매겨지고 소비되는 현재, 비슷한 영역을 탐구하는 예술 또한 이러한 코드들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작동한다. 제의에 목적을 둔 동굴벽화 이후, 이미지의 역사를 이어온 것은 예술과 종교의 복합체였다. 양자는 서로를 강화해왔다. 종교는 감성적인 형식을 통해 현실화되었고, 예술은 우리의 일상의 자잘한 대소사를 넘어 보다 깊은 차원의 내용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양자는 갈등관계에 놓이기도 하여, 감각적 이미지가 억압되는 역사적 시기도 있었다. 성상파괴부터 추상미술에 이르는 이미지 역사의 한 자락은 그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지는 그 출발이 되었던 우상이나 성상과 완전히 분리되기는 힘들었다. 현대미술에서 아무 상징도 없는 즉물적 이미지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또한 성상화 되지 않았는가. 말레비치의 사각형부터 미니멀리즘에서 현존의 체험에 이르기까지, 물자체를 분리시키려는 의지와 시도는 단지 의지와 시도에 그쳤을 뿐이다. 인간에게 종교적인 면은 억압되고 변형될지언정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종교의 불가분성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사고할 수 있게 된 이후, 보편적이다. 예술은 근대에 이르러 종교의 역할을 상당부분 떠맡았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처럼 변형된 상태로 잠재해 있다. 그처럼 종교적 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은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시키는 행위이다. 여기에는 적절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옷을 입고 이렇게 저렇게 꾸민 상태를 발가벗겨놓은 것 같은 선정성이 있다. 종교적 도상에 자기얼굴이나 어떤 모델이 분명히 드러나는 방식은 그 주변을 광배(光背)나 무늬처럼 둘러싸고 있는 여성 성기들의 모습처럼 당혹감을 준다. 성행위 뿐 아니라 상행위 이미지도 명백하다. 사원에 바쳐진, 또는 사원을 채우고 있는 사물들 또한 그것들이 관광지에서 구입한 싸구려 물건임을 감추지 않는다. 그것들은 작가가 최근 다녀온 중국, 태국, 미국 등지 종교관련 관광지 근처에서 누구나 살 수 있는 평범한 물건들이며, 종교를 소재로 할 뿐 성스러움이 가져야할 원본성, 희귀성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 특히 전시장, 또는 황금빛 사원의 주된 분위기를 조성하는 번쩍거리는 시트지는 중국음식점 실내 장식에 전형적인 속스러움의 정점에 있다.

 

키치는 그 출발부터 예술이나 종교를 흉내 냈다. 가짜일수록 진짜라는 알리바이가 더욱 필요했기 때문이다. 작가가 방문한 사원들은 성지임과 동시에 관광지이다. 그곳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모조품은 불상이나 십자가 같은 종교상들일 것이다. 예술이 종교를 이어받은 것이듯, 오늘날 예술이 할 수 있는 심미적 경험을 대신해주는 것이 여행, 즉 관광이다. 자신의 본능에 충실히 따르면서 선택된 도상들은 종교, 예술, 관광으로 이어지는 심미적 체험의 역사를 압축한다. 세 가지 심미적 체험에는 공통점이 있지만 차이도 있기에 그의 전시장, 또는 사원은 이종교배의 특성을 가진다. 작가의 관심을 끌만한 것들이 축소모델의 형식으로 동원된 장은 그가 매혹되었고 숭배하는 것들이 모여 있는 사원이면서, 개인 컬렉션임과 동시에, 관람객에게 개방된 미술 전시장이다. 모든 전시에는 이 세차원이 있지만, 여러 포장과정, 또는 승화를 통해 ‘무관심’(칸트)하다고 간주된 미적 체험만 추출하려 한다. 그러나 조현익은 그 기원들을 모두 공개한다. 심지어는 물건을 담아온 포장지까지 다 나와 있다. 그의 신비로운 사원은 사실은 신비로울 것이 없는 적나라한 짜깁기의 현장일 뿐이다.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예술과 종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거기에는 그럴듯한 가림막이 부족하다. 그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은 포르노그래피의 도상을 보는 것만큼 선정적이고 불편하다. 지금 여기의 자의적이면서도 가혹한 인간의 규칙을 넘어서는, 필연적이고도 전능한 신의 법칙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조현익의 작품이 이러한 현 진실을 냉소적으로 까발리는 것에 있지는 않다. 그는 여전히 어떤 성스러운 가치를 믿는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가 작업을 매우 열심히 한다는 점은 최소한 어느 한 가지에는 진지하다는 증거이다. 미술계에 있으면서 ‘세련된 태도’로 작업을 우습게 여기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다만 그 성스러움은 성스러움 그 자체가 아니라, 세속의 한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고 발견되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은 성지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 모양의 볼펜부터 춘화첩에 이르는 그곳 노점상에서 파는 성지관련 상품들이다. 조현익의 작품은 원본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모조품이라는 것, 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속이라는 것, 동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타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언제나 전자에게만 방점이 찍혀 왔고, 후자는 그것을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고 여겨졌지만, 이제 그 중심은 비어있고 다(多)중심으로 편재되어있음을 예시한다. 그렇다면 뉴욕의 티베트 사원 구조를 본뜬 이 사적 사원도 엄연히 또 하나의 중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원의 중심에 놓여있는 상에서 알 수 있듯, 작가가 다소간 불교에 끌려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종교들의 공통점에 주목한다. 작품 [Buddha Fan VS Jesus Fan VS Mary Fan VS Gandhi Fan]은 펜과 팬을 말장난처럼 겹친다. 특정 성자 모양의 펜을 구입할 소비자는 그 성자의 팬이며, 성자는 쓰다버리는 일용품이나 한순간 인기 몰이를 하는 스타에 비유된다. 황금빛 액자에 고이 모셔진 정물은 제목부터가 그 물건을 구입한 쇼핑봉투에 새겨진 로고이며, 여기에서 현대미술의 성지인 MOMA의 봉투, 불상의 기원인 부모불(父母佛),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private], [pussy] 같은 포르노 잡지는 동일한 차원에 놓인다. 이 전시의 메인 작품인 [사원]에도 그렇게 수집된 오브제들이 제단 위에 바쳐진 공물처럼 배열된다. 제단 아래의 중국제 방석부터 시작되어서, 가짜 촛불로 불 밝힌 제단의 한 가운데 붓다로 분한 작가와 그의 파트너가 크고 작은 여성의 성기들로 에워싸여 있다.

 

여성성기의 적나라한 해부학적 형태는 남성 작가의 어떤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것일지 모르지만, 그 본모습은 어떤 욕망도 불식시킬 만큼 잔인한 진실이다. 그러나 그 역시 포르노잡지에서 발췌된 이미지일 뿐이다. 이번 전시는 상품이 좀 더 많이 들어옴으로써 가벼워진 듯하다. 빛과 어둠의 장중한 드라마 속에 숭고함으로부터 비천함에 이르는 도상들이 등장하는 이전 작품과 가까운 [영원한 빛]은 욕망의 대상과 성스러움을 일치시키려는 일말의 연출이 있다. 여기에 바쳐진 하얀 꽃이 성(性)과 성(聖), 섹스와 죽음의 관계를 예시한다면, 황금색으로 도색한 과일 포장재는 여성 성기에 대한 유머러스한 상징물이다. 금빛 상자 안에 안치된 촛불 이미지의 실루엣이 여성 성기를 연상시키는 같은 제목의 소품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그는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본다. 과일 포장재나 티슈 갑의 타원형태, 포르노 잡지에서 수집된 해부학에 가까운 성기 도상은 황금빛 사원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조현익의 작품에서 성과 속을 잇는 가장 중요한 매개는 성(性)임을 알 수 있다. 황동판에 유화로 그려진 작품 [情家界]는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중국의 관광지와 여러 체위의 남녀 교합상이 중첩되어 있는 것으로, 성스러운 산을 변형시키는 성적 이미지 기원은 그곳에서 구입한 작은 춘화첩이다.

 

마치 성전처럼 보이는 [소원을 비는 책]에는 책이라는 틀거리에 촛불이 담겨있는데, 그것은 종교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기도하는 소박한 것임을 알려준다. 작품 [팅커벨과 각골명심(刻骨銘心)과 달마와 벤츠]에 나타나 있듯이, 부귀영화와 안녕을 희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종교이자 상품이자 예술인 형태로 가시화될 수 있다. 작품 [신앙]은 성자 인형이 달린 볼펜을 스티로폼 뚜껑에 꽂아 빙빙 돌리면서 저편의 흰 장막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 간단한 장치인데, 원근의 차이에 따라 하나씩 교대로 확대되는 모습이 4항목 중에서 정답을 찍는 수험생의 심정과 신앙이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사물이나 인간을 나름의 방식대로 수집하고 배열하는 작가의 방식은 무겁지 않다. 이전 작품에서 금속판을 갈아내 만든 이미지로 거대한 성전을 연출하곤 했던 방식이 다소간 유희적으로 변했다. 이전 작업이 (재)창조에 버금가는 무게를 가졌다면, 지금은 이런저런 소비의 산물임이 좀 더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세속적인 것을 통해 성스러움을 공략하려는 전략일 뿐, 성/속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조현익의 사원의 중심에 놓여있는 남녀교합상에서 보이듯이, 서로 다른 두 개체가 하나가 된다는 현실, 또는 환상은 성(性)과 종교의 연결지점을 알려준다. ‘부모불’이라고도 불리는 남녀교합상은 만물이 비롯된 기원이며, 그렇게 태어난 개체들은 자신의 유한함을 넘어 또다시 유전자를 영속시키는 생물학적 합체를 반복한다. 유한한 개체를 관통하는 무한의 체험은 합체에 따른 육체적 쾌락으로부터 대양과도 같은 전체와 하나 된다는 정신적 체험에 이른다. 또한 여기에서 개체가 연장되는 합체란 개체가 죽어야 한다는 역설적 차원을 거쳐야 한다. 우연찮게도 같은 발음인 두 가지 성(聖, 性)에는 모두 죽음이 전제되어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의 종말이 아닌 보다 큰 삶을 위한 ‘작은 죽음’(바타유)이다. 그래서 두 성이 등장하는 조현익의 사원에는 죽음의 향기 또한 스며 있다. 여기에서의 육체적 쾌락은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죽음까지도 포함한 쾌락, 즉 열락이다. 사원 자체가 죽은 자와 산자를 잇는 제의를 위한 공간이 아닌가. 두 가지 성(聖, 性)의 관계에 대해 누구보다도 많이 사색했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는 [어떻게 인간적 상황을 벗어날 것인가]에서 죽음과 제의의 공통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가치를 버림으로써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킨다는 점이다.

 

제의에서는 무엇인가 바쳐진다. 때로 그것은 살해로까지 비춰진다. 조현익의 작품에서는 먼저 자아가 죽고 그에게 소중한 파트너 역시 죽는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단순한 개체의 죽음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주는 것, 상실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 바로 제의이다. 바타유에 의하면, 제의는 장기 계획에 근거한 현실세계—창조하고 보존하는 세계, 지속적 현실을 위해서만 창조하는 세계—를 벗어난다. 여기에서 제의는 미래를 염려하는 생산의 반대 명제이며, 오직 순간에만 관심을 갖는 소모이다. 제의는 제공된 대상을 급작스런 소모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제의는 석탄을 화로에 집어넣는 행동과도 같은 행동이다. 제물은 모든 유용성을 벗어난다. 사물의 질서는 지속을 위해 삶을 억제하지만 신성은 그것을 비등시키는 놀라운 폭발, 즉 폭력이다. 제의의 또 다른 측면인 축제는 끊임없이 둑을 무너뜨리려고 위협하며, 소모가 갖는 순수 광채의 전염적 충동을 생산 활동에 대립시킨다. 이승에서의 노동 형태(계산, 이기주의)는 근본적으로 신적인 질서로부터 부의 화려한 소모를 분리시킨다. 근대의 종교 개혁은 비생산적 소비를 비난함으로써 축적을 가능하게 했다.

 

자본의 축적은 지금도 그렇듯이 모두를 위한 풍요보다는 타인을 억압하는데 사용되었다. 종교가 타자를 비롯한 모든 것들과의 연결망을 추구하는 것에 있다고 할 때, 금욕주의와 그로부터 비롯된 축적은 인간을 종교로부터 더 멀어지게 했다. 가브리엘레 조르고는 [순교와 포르노그래피]에서 계몽주의로 대변되는 세속화의 과정을 우주를 물질과 정신으로 분리한 것과 연계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는 기독교 신앙교리의 전통을 물려받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세속화의 진정한 의미는 세속적인 것과 세속적이지 않은 것을 분리하는 것이다. 서구의 대표적인 종교는 순교라는 고통의 신화를 쾌락의 신화로 변화시켰고, 고통과 죽음 대신 세속적인 쾌락과 육체적 욕구를 즐기는 것을 유행시켰다. 막스베버의 설명처럼, 프로테스탄티즘은 종교적 금욕의 세속화에 크게 기여했다. 고통의 또 다른 형태인 노동은 기독교 신자 개개인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노동은 인간의 욕구를 억제하고 탈선을 막았다. 노동은 세속화한 순교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적 생활방식은 교회와 수도원에서 학교와 공장으로 옮겨졌으며, 사회 구성원 개개인은 희생정신과 노동을 통한 고통을 실천했다.

 

그러나 조현익이 좀 더 관심을 쏟는 동양의 종교 전통에서 주체와 객체의 분리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여러 파생효과는 다소간 생경하다. 가령 남녀교합상은 어떤 관점에서만 포르노그래피와 같은 반열에 놓일 수 있는 것이다. 서구의 지배적 종교에서 성(性)과 관련된 성스러움은 늘 이단이나 신비주의 취급을 받았고, 어두운 하위문화로 숨어들곤 했다. 성적 상대를 사물화하는 포르노그래피는 주체와 객체가 극단적으로 분리된 결과이다. 가브리엘레 조르고는 성인 전설과 포르노그래피 문학이 피 혹은 정자를 뿜으며 끝을 맺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순교전설과 성적 환상이 결합된 것은 욕구와 고통을 결부시키는 기독교적 가학성애(Algolagnia)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구의 것이든 동양의 것이든 성스러움 안에 에로티시즘이 수행하는 역할은 유사하다. 다시 바타유로 돌아오자면, 에로티시즘 역시 제의처럼 미래를 위한 합리적 축적이 아닌, 오직 순간에만 관심을 갖는 비합리적 소모이다. 제의는 이를 통해 파괴적 열망을 분출시킨다. 폭발의 순간, 수단에 종속되었던 인간은 비로소 수단으로부터 벗어난다.

 

조르주 바타유는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성관계는 그 자체가 교환이고 충동이라고 말한다. 성은 축제의 성격을 갖는다. 성관계는 다름 아닌 교환을 본질로 하며, 그 때문에 그것은 처음부터 트임과 넘침의 충동을 부른다. 금기의 둑을 무너뜨리려는 도발적 충동은 공적인 제의나 사적인 성관계로부터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 애매한 영역, 즉 예술에 자리를 잡는다. 조현익의 사원에서는 다양한 차원의 경계의 와해가 있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큰 경계는 성과 속인데, 그 경계에 도전하는 가장 강한 힘은 에로티시즘이다.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불상은 물론, 과일껍질, 작은 상자, 신발 같은 비밀스러운 물신적 사물을 거쳐 하드코어 포르노 이미지까지 관통하는 것은 죽음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는 에로티시즘이다. 공개되어 있으면서도 비밀스런 장소를 채우는 유혹적인 장식들, 돌리고 꽂고 하는 식의 물건들에 이르기까지 공간이나 방식들도 성적인 분위기가 농후하다. 동시에 그것들은 과도함을 통해 은밀한 유혹을 차단한다. 예술이 가지는 거리두기 방식이 작동되기에 우리는 단지 매혹되기보다는 그것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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