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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념과 행동 사이에 있는 것
이선영 (미술평론가) 2016

 

금속을 주재료로 사용한 조현익 전의 번쩍거리는 분위기는 전시장이 있는 차이나타운과 잘 어울린다. 화려하고 기름진 메뉴가 많은 중국음식점 인테리어에 곧잘 사용되곤 하는 황금색 벽지 또한 철판이나 황동판과 같은 맥락으로 사용되었다. 금속은 무겁고 다루기 힘든 재료지만 가볍고 손쉬운 방식으로도 보인다. 금속은 빛을 받으면 자신의 물질감을 최소화한다. 빛에 반응하는 금속은 물질과 비물질을 오가면서 신념과 행동 사이에 있는 ‘믿음의 도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간 이후, 빛도 여러 가지가 되었다. 빛은 삶의 근원이지만 미혹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실제의 금속이든 시뮬레이션이든 조현익의 작품 속 그것들은 무거움 속의 가벼움, 가벼움 속의 무거움을 끌어내는 역설이 있다. 금속판에 사진을 전사한 후 색을 칠하거나 그라인더로 깎아 내는 사진+회화+조각이라는 복합적 과정은 공간에 설치된 이미지를 연극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게 한다.

특히 이 전시에서 작가는 관객을 위한 빈 무대 또한 마련했다. 천장 용마루까지 높이가 대략 7.5미터나 되는 규모의 전시장을 명/암의 상징적 영역으로 구별한 것 또한 이분법 속에 내재한 역설을 드러내기 위한 무대적 장치다. 2층 난간을 따라 설치된 촛불들과 그 아래 벽화 스케일의 작품들은 근대 시대에 물류 창고였다가 세속의 종교 역할을 하게 된 예술전시장으로 변모시킨다. 공간은 장중한 연출에 의해 재탄생했다. 화이트 큐브와 비교되는 전용된 공간은 탈근대적인 작품들이 나오기 적당하다. 장소의 전용은 상품과 작품 간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알려준다. 차이나타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황금색 벽지로 도배된 작품을 포함하여, 전단에 붙은 미끼 상품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가령 작품 [붙여진 것]에서 황금색 틀 안의 금속거울에 걸린 각종 종교 전단지에는 커피나 사탕 등도 달려있는데, 매우 소박한 형태이긴 하지만, 여기에서 종교와 예술, 그리고 상품 간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세 가지 항은 역사적 시차를 두고 부침을 거듭하면서 이전의 것들을 계통 발생적으로 반복한다. 오늘날 상품에는 종교와 예술이 있고, 근대시대의 예술에는 종교가 있었다. 작가는 예술, 종교, 상품 같은 것들을 물신적 사물로 버무려서 제시한다. 2층 난간을 둘러싼 촛불이나 어디선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는 금속성 소리, 다소간 어둑한 전시장 일부 등은 종교적 분위기를 고양한다. 물론 그것이 어떤 종교인지는 확실치 않다. 현실에서 수집된 여러 재료들 자체가 범종교적이기 때문이다. 전시는 풍자적이면서 위반적이지만 그러한 태도 자체도 종교적인 다소간 역설적인 분위기를 가진다. 특정 종교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종교적인 그것들을 일단 삶에 대한 종교라고 해두자. 작가에게는 예술에 대한 종교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종교처럼 삶에 의미와 형식을 부여하며, 타자들과 소통하기 때문이다. 소통은 오늘날 일반화된 기계적 소통부터 어설픈 설득, 강렬한 유혹, 강압적 방식 등도 포함한다.

주요 도상들도 역설적이다. 이전 작품에서 주요 도상으로 등장했던 여성(또는 사랑)이 성스러움과 비천함의 코드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성스러움은 현실 이상이고 비천함은 현실 이하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에는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이다. 이전 작품에서 화면을 가득 채우곤 했던 여인 대신에 작품의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아들의 모습 역시 사랑스럽지만, 아버지와 남편의 ‘도리’를 생각하게 하는 무거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작가에게 있어서 가벼움과 무거움의 관계를 생각해 볼 때, 진지함은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일 것이다. 삶이라는 어려움에 또 하나의 어려움이 추가되는 예술 작업에서 진지함은 필요조건이다. 작가는 살면서 작업을 하는 것이지, 무중력적인 시공간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음을 절로 깨닫게 하는,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중력의 힘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한다.

그러나 진지함만으로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을 삶의 무거움에 대항하는 가벼움이라고 말한 니체는 삶의 중심에 예술을 놓았던 몇 안 되는 철학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진지해져야 하며, 진지함이라는 맥락이 없는 가벼움은 그저 가벼움으로 떠내려가고 만다. 뉴욕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한 명암이 공존하는 천사상을 기점으로 구별된 영역은 섞이기 위해서 분리되어 있을 뿐이다. 원래 천사들은 천상과 지상을 오고가는 경계 위의 존재이다. 요즘은 천사 대신에 각종 전자파들에 실린 정보들이 유통된다. 이번 작업의 출발이 된 찌라시는 정보의 원초적 형태다. 아파트 철제 우편함에 일괄적으로 끼워져 있는 전단들은 대부분 보여지지도 않은 채 버려지는 정보들로, 작품들을 통해 삶/예술의 가벼움/무거움을 생각게 하는 주제로 탄생했다. 전시제목 ‘믿음의 도리’를 낳게 했던 문제의 전단들은 열혈 신도가 자신의 ‘믿음의 도리’를 다하기 위한 실천이었을 것이다.

신념은 의식 뿐 아니라 행동을 낳는다. 그것이 허위의식이 될 수도 있고 행동 역시 죽음을 불사하는 맹목이 될 수도 있지만, 인간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인 장치 속에서 살아간다. 작가는 전시의 키워드 중의 하나인 ‘도리’를 ‘duty’라고 번역한다. 필자는 여기에 (광범위한 의미의)이데올로기 또한 덧붙이고 싶다. ‘도리’란 현실 그 자체라기보다는 어떤 지향과 당위라는 면에서 그러하다. 지향과 당위에는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따른다. 이 전시에서는 표피적으로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소재로 삼았지만, 예술이나 정치 등 다양한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국의 문예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동서 간 이데올로기적 장벽이 무너진 즈음에 쓴 [이데올로기 개론](1991)에서 이데올로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근본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작금의 상황 또한 ‘이데올로기의 종언’(다니엘 벨)의 문제를 무색하게 한다.

그래서 단순한 보수주의든 세련된 이론의 형식을 갖춘 담론이든 ‘이데올로기의 종언’ 자체가 이데올로기라고 비판된다. 당장에 북한만 봐도 그렇다. 독재자와 지배 이데올로기에 중독된 이들의 모습은 남한의 이데올로기적인 요구에 의해 저녁 뉴스를 장식한다. 이러한 심각한 웃음거리는 도처에 편재한다. 적대세력, 또는 경쟁세력들은 서로의 생각과 행동을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은 결코 이데올로기라고 보지 않는다. ‘자유주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민낯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적나라한 강령보다는 욕망을 통해, 주체의 형성 단계로부터 작동한다. 테리 이글턴은 가장 효율적인 억압자는 그의 하수인들이 그의 권력을 사랑하고 욕망하고 그것과 동일시하도록 설득하는 자라고 말한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는 지배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저항 이데올로기에도 적용된다.

이데올로기는 어떤 편향적인 사고라기보다는 문화나 세계관과 비교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에서 상식과 통념(doxa)을 이루면서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통용된다.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경우, 그것은 고도로 난해한 형이상학적 원리에서부터 일상생활의 관습을 지배하는 꼼꼼한 세부적인 도덕적 처방까지 이른다. 테리 이글턴에 의하면 종교는 개인의 특유한 삶에 대해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것은 또한 양자 사이의 괴리를 합리화하는, 즉 내가 왜 이러한 우주적 진리에 맞게 살지 못하는지를 설명하고, 나의 일상적 행위를 그 요구에 맞추기 위한 강령과 의식을 포함한다. 신념은 구체적 행동을 낳기 때문에 단순히 허위일 수 없는 문제다. 영국의 사회학자 애버크롬비는 [계급·이데올로기·실천: 지식사회학의 문제]에서 이데올로기가 순전히 허위적인 신념이라면 그처럼 위력적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적임과 동시에 기만적이다.

테리 이글턴 역시 이데올로기를 단지 비현실적이며 사회 현실로부터 완전히 절연된 환상이라는 입장을 거부한다. 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반성적인 이론적 체제라기보다는, 일련의 행동 지향적인 신념으로, 그 추종자들에게 목표, 동기, 처방, 명령 등을 제공한다. 작가가 사는 아파트 우편함에 끈질기게 전단지를 넣었던 열혈 종교인의 행위에서처럼 말이다. 필자는 전시장 가는 길에도 십자가를 가운데 놓고 양쪽으로 멸공이라는 붉은 글자가 새겨진 모자를 쓴 할아버지를 보았다. 가방은 메가폰으로 개조되어 있는 상태였고, 아마도 비슷한 부류들이 많이 모이곤 하는 인천 자유공원으로 가는 중이었을 것이다. 작년에도 같은 지역에서 어떤 보수 논객의 강연회 참석에 설탕 3kg을 내건 포스터도 본 적이 있다. 유치하고 어설프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순수한 현상 형태로 보이는 것들은 우리의 관심을 끈다. 그러나 그러한 눈에 띄는 행위들은 빙산의 일각이며, 보다 편재하는 것은 상품물신주의라는 바다가 아닐까.

조현익 전에서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황금색 표면들은 상품물신주의를 대변한다. 작품 [믿음의 도리-탄생]의 황금빛 용좌 위에 앉은 아이 이미지에서 보여지듯 물신주의는 태어나면서부터 일련의 환경을 이룬다. 물신은 빛나는 것 배후에 그렇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애버크롬비는 물신주의적 사고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만 특수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역사상의 어떤 생산 양식보다도 더 물신주의적 사고를 조장한다고 본다. 물신적 사고는 노동자가 자기의 생산물과의 관계를 상실한 결과다. 그것은 합리화와 전문화를 명분으로 한 분업의 증대를 통해 인간의 충만한 삶에 필수적인 유기적 통일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팽배해진다. 이때 물화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은폐작용을 하는 현실이다. 애버크롬비는 이러한 물화된 세계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기보다는 자연적이고 영구적인 것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무엇인가를 자연화, 보편화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작용이다.

이때 사회는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의 통제 밖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화와 신비화는 별개의 두 과정이 아니라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관계를 사물인 것처럼 그리고 자연적인 것처럼 본다. 조현익 전에 넘실거리는 황금빛은 화폐라는 추상물에 의해 매개되는 교환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금본위제 때 화폐는 금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현대에 통용되는 화폐는 어디에 그 가치의 근거를 두고 있는지 불확실하다. 이데올로기는 실재라 진리가 아니라 조작과, 조정의 문제가 중시될 때 힘을 발휘한다. 부조리해 보이는 사회의 여러 현상들은 대개 상충되는 이해관계의 산물이다. 조현익의 작품에서 아파트 입주민들이 그것들을 보기 전에 치워야 한다는 수위 아저씨의 임무로 인해 어떤 종교인의 ‘믿음의 도리’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입주민이자 작가에게 문득 깨달음을 준 이 사건은 작품을 통해 또 다른 영역에 등장한다.

신도부터 작가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는 과정은, 인간 사회에서 하나의 도리만 있는 것이 아니며, 각각의 도리는 서로 상충되기도 함을 알려준다. 이러한 상충이 해결되는 방식이 이성보다는 힘의 원리에 따르고 있다는 현실 의식이 조현익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류의 블랙 유머를 낳을 것이다. 어떤 신념은 거짓이거나 또는 진실이지만 지켜지기 힘들 때 버려진다. 전시장 초입에 붙어있는 작품 [버려진 가훈Ⅱ]에 자수로 새겨진 단어 ‘일심(一心)’은 작가의 어머니가 직접 만든 것으로 어릴 적에 집에 걸려있었으나 수십 년간 집 창고에 방치되었던 가훈이었다. 작품 [버려진 가훈]의 길에서 주은 ‘인고, 성실, 근면’이란 붓글씨 역시 누군가에게는 한때 지켜져야 할 소중한 가치였을 것이다. 봉황에 감싸인 채 멋들어진 필체로 등장하는 ‘믿음의 도리’는 작가로 하여금 버려졌던 것들을 호출하게 했다. 작가는 여기에 그 무엇도 첨삭하지는 않았지만, 선택 그 자체만으로 어떤 메시지와 그것을 포장하고 있는 형식들이 낡아보이도록 연출했다.

일심이든 인고 성실 근면이든 지켜지기 힘들지만, 아니 이제는 더 지켜지기 힘들기에 없어진 것처럼 돼있는 가치들이 주목해야할 만한 작품들의 반열에 나란히 세워진다. 이 전시를 관통하는 수많은 역설처럼 모셔놓았다는 것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버려진 가훈들 다음에 등장하는 우편함과 납골함은 메시지들이 전달되는 수신자와 그 부재를 알려준다. ‘믿음의 도리’라는 전단이 하나씩 꽂혀있는 이미지의 작품 [믿음의 도리-우편함]은 획일적인 집단 주거지를 소규모로 축소한듯한 모습이다. 여기에 무차별적으로 유포되는 메시지 또한 같다. 그 작품은 원자화됨과 동시에 획일화된 가정에 송수신되는 상품/메시지 또한 상징한다. 그 옆의 납골함은 우편함의 방식과 유사하게 그리드 구조 속에 하나씩 안치되어 있다. 죽어서도 상품/메시지의 전달 경로는 비슷하다. 삶부터 죽음까지 격자화된 공간 속에서 좌표화되는 것은 일관된다.

이데올로기는 누군가 자신의 신념을 전단지로 전달하는 구체적인 행위만큼이나 이러한 추상적 구조 속에 편재한다. 오늘날 구조는 주체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구조들은 어느 정도 획일적으로 결정된 삶을 예시한다. 삶과 죽음의 축소모델이 새겨진 철판은 부식과 스크래치 등 시간의 흔적을 감추지 않는다. 무너뜨리기 위해 세우는 도미노처럼, 단단한 판은 그렇지 않음을 위해 역설적으로 사용되었다. 제단화풍으로 3면에 걸쳐 펼쳐진 작품 [믿음의 도리]와 [근조화환]은 그 말이 새겨진 찌라시처럼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단단한 판에 새겨 반듯하게 세웠다. 그러나 그 양쪽에 근조 화환들은 이러한 세워짐이 동시에 무너짐임을 알려준다. 습기와 압력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마블링이 된 철판들은 근조 분위기를 배가한다. 이미지를 새기기 위해 판을 깎아 내는 과정은 혼돈을 다시 질서화 하는 과정이지만, 이 또한 시간의 시험을 견뎌내야 한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자연적 오염 외에 인위적 스크래치를 더하여 메시지를 전달했다. 작품 [믿음의 도리-봉황]은 중심을 텅 비워놓았다. 성스러운 도상인 봉황에서 죽죽 흘러내리는 부식의 흔적이 빈 중심을 횡단한다. 전시기간 내내 관객들에게 포토존으로 활용되곤 했던 이 작품에서 작가는 무엇이 사라지고 무너졌는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물론 메시지의 전달자인 작가는 눈에 안 띄는 바닥에 무엇인가를 떨어뜨려 놓긴 했다. 그것은 보통 봉황들과 함께 등장하는 어떤 꽃이다. 전시장의 반을 채우는 무겁고 풍자적인 분위기는 명암이 공존하는 [수호천사]를 기점으로 가볍고 화사해진다. 그것은 아마도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생명이 주도하는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거리에 뿌려지는 전단지마저도 황금빛 액자나 거울에 붙어있다. 메시지는 거울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비추며, 그러면서 인간을 만들어 나간다.

현실이 아닌 상상을 보여주는 거울은 상징만큼이나 자아를 형성한다. 현실을 직시하기 힘들기에 상상과 상징은 힘을 발휘한다. 훌륭한 행위에 대한 포상들 역시 인간을 구성하는 메시지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상장의 의미도 모를 아이에게 남발하는 상장들은 상을 주는 행위자의 권위 내지 권력을 표현한다. 작품 [낱말]과 [찾기]는 이제 막 말을 배우고 있는 아기에게 준 상장의 형식이다. 외국어가 아닌 모국어의 경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배웠는지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체화된다. 이때 언어는 타자로부터 유래한 무의식의 위상을 가진다. 물론 부모는 교육자의 입장으로 아이를 다루겠지만, 아이는 듣기와 흉내내기를 통해 말을 배운다. 상장 안에 들어있는 이상한 단어들인 꺼껑(뚜껑), 계릉(계란), 이마방(선풍기) 등에 해당되는 이미지가 있는 작품 [찾기]가 [낱말] 저편에 같은 형식으로 배열되어 있다. 아이의 인식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말과 사물은 근접을 지향하지만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다. 이러한 불일치는 잘못된 인식을 낳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미숙함은 착종되어 있는 말과 사물의 관계를 갱신할 수 희망이기도 하다.

3미터 높이의 황동판에 새겨진 아이의 모습이 있는 [믿음의 도리-탄생Ⅱ]는 17개월 된 아들의 기념비적인 초상으로 숟가락과 밥그릇을 손에 쥐고 당차게 앞을 향한 모습이다. ‘제 밥그릇 가지고 태어난다’는 옛 속담은 희망처럼 들릴 정도로 엄혹한 현대사회에서 밥그릇과 숟가락을 들고 있는 천진한 아이는 요즘 유행어처럼 ‘금수저’가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듯하다. 또 다른 작품 [믿음의 도리-탄생]처럼 용좌에 앉아있는 아이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조현익의 작품에서 이러한 희망사항은 격세유전적이다. 그 앞의 작품 [엄마와 나-기도]에 사용된 숟가락과 밥그릇은 작가가 아이 적에 사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천장에서 금줄로 내려오는 어릴 적 숟가락이 모터 장치에 의해 빙글빙글 돌고 있는 밥상 위의 그릇을 계속 내리친다. 지구가 자전을 하듯이 매일 삼시세끼를 해결해야 하는 인간에게 삶은 심각하다. 인간이 삶과 죽음의 문제, 즉 인간의 한계를 생각했을 때 종교가 탄생한 것이며, 이는 경제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전시장 가득히 울려오는 숟가락 치는 소리는 작가 말대로 ‘절의 풍경처럼 상여의 딸랑거리는 소리처럼, 천주교의 종소리처럼 듣는 이에 따라 다르게’ 들려온다. 전단지에 실려 온 일방적 메시지로서의 종교는 풍자적이지만,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생명의 모든 과정들에 따라야 할 크고 작은 기적들을 생각할 때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울려 퍼진다. 관객들의 동선의 마지막 지점에 걸려있는 작품 [영원한 빛]은 촛불에 에워싸인 채 국화꽃을 덮고 있어 죽음을 둘러싼 제의적 분위기가 풍긴다. 거기에는 끈적한 물질로부터 광휘에 이르는 원소의 계열이 있다. 죽은듯 누워있는 그녀는 바타이유를 포함한 많은 남성 예술가들이 즐겨 표현해왔던 성적인 희열의 절정에 존재하는 죽음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과 죽음의 드라마를 재현하는 제의적 방식을 취한다. 작가는 한 장의 찌라시부터 장중한 제단의 양식을 취하는 종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을 끌어들이면서 삶의 근본적인 모습을 반추한다. 조현익은 종교인은 아니지만, 종교적인 사람으로 추측된다.

예술이 종교의 어떤 측면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작업에 몰두하는 이에게는 종교성이 감지된다. 그러나 그가 구사하는 역설 어법은 종교 내부에 있다가도 외부에 있는 방식을 취하게 한다. 그는 경계를 왔다갔다하는 불경스러움을 통해 성스러움을 환기시킨다. 제도에 의해 둔탁하게 된 종교는 이러한 부정적 방식을 통해 더 잘 드러난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가령 작품 [엄마와 나-기도]에서 드러나는 지나치게 화려한 연출은 자전적 스토리를 빼면, 결국 ‘먹고사는 문제’로 보편화될 수 있는 예술을 포함한 모든 심각한 종류의 위선적 행태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 ‘믿음의 도리’라는 선택된 전시부제 자체에 내재한 일련의 ‘의무duty’(작가)는 가치의 지향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보여준다. 상징적 의미가 강한 도상들 외에, 텅 빔, 과도함, 상처, 흘러내림 등은 이러한 이 괴리들에 상응하는 형식들이다. 현실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이러한 괴리를 감추기에 급급하지만, 예술에서는 적나라하게 나타난다. 예술은 육체와 물질이라는 실재가 맞부딪혀 생겨나는 정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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