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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트다
정현 (미술비평, 인하대 교수) 2016

돌잡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황금색 바탕 위에 그려진 아이는 조현익 작가의 아들이다. “믿음의 도리”라는 제목은 다소 무겁게 느껴진다.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책임감의 무게 때문이었을까. 돌이켜보니 대부분의 부모가 새 생명을 처음 마주할 때 심장이 터질 정도로 부풀어지는 경험을 가졌을 것 같다. 이처럼 조현익은 지속적으로 자신이 겪고 있는 현재의 고민, 사건, 현실을 작업의 중심으로 끌어온다. 몇 해 전에는 고통만큼 황홀한 성적 쾌락이라는 주제를 통해 생의 열망과 죽음 충동을 한 장면에 담으려는 ‘기념비적’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졌다. 조현익에게 삶의 궤적은 창작에 의하여 또렷한 흔적으로 남는다. “믿음의 도리”라는 표제는 우체통에 꽂혀있던 한 교회 전단지에서 발견한 문구라고 한다. 우연의 일치이지만 현재 한국사회도 또 다른 ‘믿음의 도리’ 때문에 예상치 못한 ‘상실의 시대’를 겪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작가가 꿰뚫어본 것도 작금의 사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잘못된 믿음의 실천과 지나친 믿음의 요구와 보상 없는 책임의 무게를 작가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깊게 그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성과 속에 관한 질문은 초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작가의 화두이다. 신학적 관점으로 볼 때 성과 속은 공존한다고 한다. 성스러운 것 주변에는 언제나 세속적인 것이 함께 한다. 중세 유럽의 도시가 그러했다. 교회가 있고 그 주변에는 장터가 열렸다. 야바위꾼, 매춘부, 노숙자 들은 성스러운 곳 주변에 기생한다. 조현익은 무질서하고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일상의 순간들을 창작의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 일종의 질서를 부여한다. 종교란 온갖 의문투성이의 삶에 의미라는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모더니즘 미술가들이 형상을 제거하고 흰 화면을 제시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초월론적 종교관의 영향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동시대 미술에서 초월론적 예술관이란 과장된 개념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예술가의 활동은 주어진 삶의 형태를 따르기보다는 스스로 자신만의 형태를 찾아가는 노정의 기록임을 부정할 순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일만큼 다양성과 다중성을 부르짖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선적이었는지를 자각해보자. 그는 유물론적 사상을 바탕으로 팽창한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약간 비껴서 자신의 마음상태를 관측한다. 이 같은 태도는 자각과 해방을 찾아가는 작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특히 회전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밥그릇을 천장에 매달린 숟가락이 타격하는 설치 작업 “엄마와 나-기도”는 하찮은 것을 성스러운 울림으로 전환시킨다. 굳이 다루기 어려운 금속 재료 위에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위의 태도와 일치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작가는 물질을 기반으로 정신이라는 가치를 고집스레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디지털 문화가 심각하게 육체를 현실 밖으로 추방하는 현상에 반발하듯 최근 들어 다시금 질료와 매체를 다루는 작업들이 등장하는 이유도 진지하게 생각해볼 만하다. 한편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개신교는 자본주의를 활용한 종교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종교의 성스러움도 현실적 세속으로부터 전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를 향한 우리의 믿음과 현실이 자주 불일치하는 이유는 인간과 신의 차이 아니겠는가. “믿음의 도리”는 삼면화의 방식을 차용한다. 중앙은 믿음의 도리라는 문구가, 양편에는 근조 화환이 그려져 있다. “믿음의 도리-전단”에서는 조악한 황금색 액자 안에 문제의 전단지를 붙여 놓았다. 성스러움의 클리셰와 세속화된 종교의 이종교배는 어떻게 신성함을 유혹의 기표로 활용하는지를 엿보게 한다.

 

다시 아들의 모습을 담은 장면으로 돌아가자. “믿음의 도리-탄생 Ⅱ”는 “영원한 빛”과 관계를 맺는다. 영원한 빛 속, 눈을 감은 채 살며시 입술을 벌린 여인을 중심으로 마치 폭죽과 같은 꽃송이가 터지는 장면과 의젓한 아들의 모습이 포개지는 상상을 해본다. 작가의 복합적인 감정이 이 두 작업 사이의 여백에서 풍부하게 펼쳐진다. 이 글의 제목 “눈트다”는 싹이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낱말이다. 성과 속의 관계는 분리된 게 아니라고 한다. 속은 성을 눈트기 위한 조건이고 성은 속을 통해야만 가능한 게 아닐까? 신학자 엘리아데는 이렇게 말한다: “즉 성육신이란 신이 스스로를 인간의 몸에 감춤으로써 더 이상 신으로서 인식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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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 엘리아데, 『상징, 신성, 예술』, 서광사, 1991,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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