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빛(Eternal Light)을 찾아서  
조현익의 예술세계
이진명 (큐레이터, 간송미술문화재단 ) 2015

 

조현익 작가의 작품은 두 가지 측면을 나누어 고려하고 최종적으로 다시 종합해보면 감상하는 묘미가 살아난다. 첫 번째 측면은 외양적인 것이다. 작가는 분명히 회화의 깊이에 천착하기 때문에 회화가인데 영역이 확장된다는 점이다. 설치미술의 요소, 영상예술의 요소가 회화에 침범한 것이 아니다. 회화의 주요 동기와 목적에 의해서 스스로가 설치미술이나 영상예술의 영역으로 뻗어 나온 것이다. 회화를 좀더 클로즈업해서 들여다보자. 철판, 즉 아이언 플레이트에 단독의 여인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차가운 강철의 물성 속에 여인은 법열이나 사랑의 환희, 혹은 믿음을, 뜨거움을 발산시킨다. 이 여인은 제단의 주인공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렸던 「키스」나 「유디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잠시 클림트의 법열적 사랑에 생각이 미치다 이내 마왕퇴에서 발굴된 「채회백화」로 방향을 옮겨간다. 잿빛으로 그려진 이 귀중한 비단그림에 까마귀 · 두꺼비 · 해 · 달의 도상을 볼 수 있다. 기원전 150 년 전의 이 그림은 회화라는 인류양식이 제의와 믿음에 기반한 인간활동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까마귀는 태양이라는 이치(理)와 정보를 상징할 것이며 두꺼비는 달의 음기(氣)와 물질성을 뜻할 것이다. 높이 2미터 남짓한 이 그림은 각각 천상계와 지상계, 그리고 지하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간략한 상징과 묘사로 훌륭하게 설명한다.

 

또 하나의 생각해볼 만한 그림으로 고대 중국 전한대에 제작된 「복희여와도」가 떠오른다. 이는 천지창조의 설화를 표현한 것이다. 오른쪽의 남신(男神) 복희는 왼손에 측량을 위한 곡척(曲尺)을 들고 있다. 반면 왼쪽의 여와는 오른손으로 가위를 들고 있다. 둘은 어깨를 껴안고 하나의 치마를 입고 있다. 그런데 하반신은 서로 몸을 꼬고 있는 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것은 DNA가 꼬여있는 모습과 유사하다. 창조신인 이들이 서로 몸을 꼬고 있는 모습은 이를 통하여 세상의 조화와 만물의 생성됨을 표현한 것이다. 세계를 남녀의 조화와 완벽한 영혼의 화합 및 성(性)의 교통으로 파악했다. 복희는 정신을 뜻한다. 곡척은 생각과 계획을 뜻한다. 이지적이며 정신적인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말하는 테오리아(theoria)의 세계다. 반면 여자인 여와의 가위는 매우 실천적이며 복희의 계획을 통해 만물을 재단하는 추진력이다. 여와는 프락시스(praxis)의 세계다. 성리학적으로 말하면 복희는 체(體)이며 여와는 용(用)이다. 조현익의 여인들은 겉모습은 클림트의 여인들을 떠올리지만, 내용에서는 마왕퇴와 여와를 떠오르게 한다.

 

조현익 작가는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힘이 남성적이며 사유적이고 원리적인 세계에 있다기보다 여성적이며 감각적이고 실천적인 세계에 있다고 파악한다. 실로 노자 『도덕경』 5000자는 여자에 대한 찬사로 일관한다. 노자가 말하는 ‘곡신(谷神)’은 계곡의 하느님인데, 그가 세계를 이루는 도(道)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곡신을 여자의 성기나 자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많고, 그 사유방식도 매우 타당해 보인다. ‘곡신불사(谷神不死)’라는 말도 있다. 여성의 생산성은 영원해서 천덕(天德)과도 같다는 뜻이다. 노자는 도를 가리켜 ‘현빈(玄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윽하고 현묘한 암컷, 즉 여자’,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빈지문(玄牝之門)’이 우리를 낳는 여성의 성기이자 지극한 어머님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노자는 『도덕경』 4장에서 “도는 텅 비어있지만 작용은 다함이 없고, 깊은 못과 같아서 만물의 근본인 듯하다. 날카로움을 마모시키고, 어지럽게 얽힌 것을 풀어버리고, 밝게 빛나는 것을 흐릿하게 하고, 흙먼지처럼 더러운 것과 함께 한다.”고 노래한다.[1] 이 4장의 노래를 인식론적으로 해석하면 빅뱅 이전의 무에서 유로 창조되고 현상계로 펼쳐지는 과정을 찬양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노래에 등장하는 ‘텅 빔’과 ‘깊은 못’, 그리고 ‘날카로움(남성성)을 진정시킨다.’는 메타포를 여성이나 여성의 성기로 해석해도 깊은 의미가 생성된다. 그것은 생명의 시작이자 곡척과 가위의 융합이며 날카로움을 평화로 이끄는 적극적인 몸짓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낳고 기르고 유전시키는 주체는 바로 여성이며 여성성이다. 조현익 작가가 여성을 찬미하며 제단을 설치하고 촛불로 그 그윽한 깊이에 믿음을 거는 것도 이러한 통찰력 때문이다.

 

차가운 아이언 플레이트는 여와가 들고 있는, 날카롭게 갈린, 서슬의 가위 이미지이다. 그러나 작가가 그려낸 따뜻하고 아름답고 뇌쇄적인 여인의 이미지는 여와의 생산성이며 곡신(谷神)이다. 계곡의 하느님이다. 여자의 성기가 지닌 그 무한한 덕(德) 자체이다.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가르침은 진선미를 깨닫고 이를 합치시키고 융화해내야 한다는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의 길에 있다. 플로티누스 역시 ‘일자(一者)’와 하나됨을 깨닫고 체득한 후 실천하는 ‘덕성(德性, virtue)’에 모든 가치를 부여했다. 우리의 대승불교도 깨달음 이후의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더욱 높게 평가하며, 유가에서도 리(理)의 천심(天心)을 본 후 실천적으로 전개시키는 인의예지(仁義禮智) 사단의 실천을 군자가 가야 할 영원한 길로 가르친다. 이 모든 것은 여성적인 여와의 길이다. 이와 같은 궁극의 가야 할 길을 생각하면, 비로소 조현익 작가가 그린 세계는 단순한 에로티시즘의 세계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째서 에로티시즘에 종교적 숭고를 일치시키고 차가움을 따듯한 방향으로 전회시키려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작가의 세계에 우리가 동참했을 때, 한번 더 느껴보고 조금만 더 상상했을 때, 우리의 일상은 또 다른 깊이와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말하는 ‘영원의 빛(Eternal Light)’은 서구에서 말하는 로고스(logos)의 빛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뿌리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겸양으로서의 빛일 것이다.

 

조현익 작가는 2005년 무렵부터 한없이 관객을 빨아들이는 회화 작품과 함께 최근 마법 같은 그림자 작품, 그리고 회화와 설치미술이 결합된 형태의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해왔다. 그 근간에 서구의 물질적 실험(물성)과 동양적 근원적 우주론적 사고를 회통시키고자 하는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조현익은 종교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엘리아데(Mircea Eliade) 키드였다. 엘리아데는 현상인 대지(여성, 어머니)와 초월현상인 하늘(하느님)의 조화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산을 가리켜 ‘세상의 중심축(Axis Mundi)’라고 말했다. 인류에게 산은 하늘과 땅을 잇는 샤머니즘의 산실이었다. 샤머니즘에서 고등문화인 예술과 고등종교가 분화되고 발달되었다. 현대는 과학주의의 시대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서만큼은 예술과 종교에 기대고 있다. 거슬러올라가면―마왕퇴나 복희와 여와의 그림에서처럼―인류는 살아가는 방법을 샤머니즘에서 찾았고 여전히 진행 중이며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샤머니즘은 세상만물에 대한 겸허함을 몸소 표현하는 지극한 몸짓이다. 그래서 그것은 산을 닮았다. 작가도 여성을 표현하고 감각적으로 제단을 설치하지만 산을 닮은 작가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작품도 세계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겸양이라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작가의 세계를 더욱 기쁘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1] 老子, 『道德經』, 4장, “道 沖而用之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基銳 解基紛 和基光 同基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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