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믿음을 위한 소망
이선영 (미술평론가) 2018
2018년 7월에 열린 조현익의 11번째 개인전 metamorphosis는 스스로 10번의 전시를 되돌아봄으로써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 것인가를 가늠해 보자는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회고전적 성격을 가진다. 자신이 해왔던 작품들이라도 전시회를 통해 한번 맥락화됨으로써 빈 곳, 즉 미진한 부분과 새롭게 시작할 부분이 비로소 드러나기 마련이기에, 한 작가에게 전시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값비싼 검증행위인 셈이다. 그것은 머릿속으로만 진행할 수 없는 예술의 특징이다. 10번 정도 개인전을 치른 작가라면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계속 작업을 할 가능성이 크다. 이제 막 40세를 넘긴 나이에 10번 이상의 개인전을 했으면 그동안 열심히 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쉽게 그만두지 못한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지난 15년간의 작업 중에서 2008년부터 2018년까지의 10년 동안의 작품들에서 골랐으며, 근래의 작품도 포함시켰다. 최근 작품에는 어린 아들이 ‘자유롭게’ 찍은 사진들도 포함된다.
남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자신에게 크게 다가오는 것들로부터 작업을 시작하고 키워나가는 방식은 사랑하는 여인이 화면 가득히 담겨있던 초창기 작품부터 발견된다. 예술은 나의 세계를 우리의 세계로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간의 발명품이다. 대형 설치작품을 포함하여 작은 소품까지 70여 점 되는 작품들의 배열은 많은 고민을 낳았을 것이다. 금천예술공장의 전시장은 결코 좁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설치작품을 포함한 70여 점의 작품을 한 번에 소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가벽을 설치한 몇몇 구역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개인전이라 할 만한 응집력을 가지고 연출되었다. 그러나 지난 개인전들을 그대로 옮겨온 것은 아니며, 지금의 관점으로 강약을 조절했다. 물론 현재 생각이 바뀌었다고 이전의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있는 그대로의 변화되고 있는 모습을 응시한다. 그의 작품은 에둘러가지 않고 직접 표현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 방식 때문에 스스로도 낯설게 다가오는 것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예술은 모든 것이 지나고 나서야 오는 것이니까.
각 시기의 작품에는 몸과 영혼에 남겨진 시간의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 선명하다. ‘metamorphosis’라는 전시 부제는 그동안의 변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작품의 변화를 반영한다. ‘metamorphosis’는 그냥 변화가 아니라, 변신 즉 생사고락이 관통하는 유기체의 변화와 관련된다. 형식 면에서 형상성을 고수해왔던 그의 작품들에서는 그때마다의 관심사가 반영된 몸에 대한 드라마틱한 관점이 있다. 관심이 관심으로만 머문다면 일반 관객인 제삼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작가가 전시를 통해 세상에 던져진 작품들 하나하나를 해명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그는 한 관심사를 표현하기 위한 구체적 해법에 골몰한다. 심지어는 그 관심사가 사라질 무렵에도 그 해법에 대한 연구나 실험은 계속되었던 듯하다. 시작은 우연적이어도 마무리는 필연적이다.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이 떠내려가도 작품은 남아있다. 철판 작업이 대표적이다. 육중한 재료들에서 발산되는 물성의 특이함 때문에 그는 ‘철판 작가’라는 평가를 받은 적도 있다.
물론 철판 작업은 새로운 소재 및 실험과 더불어 지속될 것이지만, 최근에 대거 도입된 오브제나 사진 작업 등은 철판 작업을 작가가 구사하는 여러 기법 중의 하나로 상대화시키고 있음을 알려준다.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해준 사건들에 대해 담담해진 요즘 작업에도 그 매체는 적절한 맥락에서 재출현하여 힘을 발휘한다. 한 여인이 가득했던 철판에는 현실의 종교나 정치를 비롯한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한 풍자가 자리한다. 여인을 뒤덮었던 꽃은 근조 화환이 되어 현실을 풍자한다. 조현익에게 육중한 철판은 내밀한 것으로부터 바깥으로 확장되는 정치적 메시지까지 모두를 담을 수 있는 친숙한 매체이다. 20대 작품 속 여성과 30대 작품 속 가족의 이미지의 대조는 거의 빛과 그림자의 대조만큼이나 선명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밝음과 어둠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가령 작품 [수호천사]는 두 가지 면을 한몸에 표현한다. 어두컴컴한 설치작품에서의 빛의 역할은 승화를 갈망하지만, 태양처럼 빛나는 해맑은 아이 이미지에 깔린 정서는 아버지로서의 묵직함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20대에서, 30대, 40대가 되어감에 따라 깊은 어둠의 세계는 밝혀진다. 물론 그것은 불행도 행복도 아니고, 삶을 대하는 작가의 인식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예술은 작은 변화도 기록함으로써 기념비적인 것이 된다. 어둠 속에서 빛이 더 강렬하듯이, 삶 또한 죽음의 그림자를 포함한다. 그의 작품에 편재하는 빛/어둠, 가벼움/무거움, 삶/죽음, 성/속, 사물/예술 등의 대조 항은 완전히 중첩되지는 않지만 일련의 계열을 이루면서, 형이상학적인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는 종교인은 아니지만, 그의 작품은 종교적이다. 여기서의 종교는 제도로서의 종교가 아니다. 굳이 종교라 한다면, 특정 신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우주적 종교(cosmic religion)’(엘리아데)이다. 만신전이 떠오르는 전시장에서의 ‘종교’는 현실의 종교를 풍자한다. 몰입을 통한 열락과 희생이 있는 삶에서 가장 큰 종교는 예술일 것이다. 이때 종교는 보다 넓은 지평, 즉 인문학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종교학자 엘리아데가 [종교의 의미-물음과 답변]에서 말하듯이, 의식의 역사의 한 단계가 아니라, 의식 구조의 한 요소를 말한다. 조현익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성스러움(그리고 그 대응격인 세속성)이다. 엘리아데는 그 책에서 성(聖)의 경험을 나타낼 때 종교라는 용어보다 더 적절한 용어는 없을까를 묻는다. 그에 의하면 종교라는 용어는 성(聖)의 경험을 지칭함으로써 존재, 의미, 참과 같은 개념에 참여한다. 엘리아데는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고유한 실재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하는 확신 없이, 인간 정신이 어떻게 활동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참되고 의미 있는 세계에 대한 인식은 본래 성(聖)의 발견과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엘리아데는 인간 정신은 성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참되고 강력하고 풍부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즉 무질서하게 아무렇게나 뒤섞여 있는 사물들과 그것들의 우연적이고도 무의미한 출몰—과의 차이를 포착해왔다.
우주적 시간에 비한다면 짧은 시간을 살다가는 인간에게 보다 긴 시공간에 대한 상상은 필연적이다. 제도로서의 종교가 쇠할 무렵 예술이 그 역할을 떠맡은 것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근대시대의 예술은 ‘예술종교’라고 지칭되기도 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기존의 예술이 포함했던 종교를 배제하지만, 그것은 예술 자체를 종교의 차원으로 고양 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다. 어쨌든 당면한 현실을 넘어 그 전후와 위아래를 생각해보는 조금이라도 진지한 사람에게 종교적인 것은 친밀하다. 15년간의 작업 일부들에서 보이듯이, 조현익의 관심사는 삶의 여러 국면에 걸쳐있다. 많은 작품들이 모여있는 전시장에서 삶은 보편적이고 총체적으로 다가온다. 전시작품에는 종교적 도상이 동원되는 것은 물론, 제의적 공간이 연출되기도 한다. 무엇인가를 기념한다는 것 그 자체가 종교적 의례의 특징이다. 종교적 의례는 성스러웠던 것이 기원했던 시공간을 재현하는 것을 말한다. 성스러움은 세속, 즉 일상과는 구별되는 무엇이었기에,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예술적 상상력이 필요할 것이다.
아예 [믿음의 도리]라는 단어가 분명히 박혀있는 작품을 비롯하여, 조현익의 작품은 개인적, 사회적 차원의 신념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노래의 가사처럼, 인간이 중요시해야 할 것으로 흔히 ‘사랑, 믿음, 소망’이 꼽히는데, 청년기의 작가를 사로잡았던 것이 사랑이라면, 지금은 믿음이다. 소망은 이 둘을 지켜나가고 잘 표현하는 것과 관련되지 않을까. 그가 자주 사용하는 촛불은 이러한 소망과 연결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오브제 등을 활용하는 최근 작품에서의 믿음은 다소간 풍자적이다. 풍자란 가려진 진실에 대한 반대급부이다. 비종교적인 사람은 종교에 대해 풍자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소망의 경우에는, 결혼해서 가족을 이룬 생애주기를 반영한다. 특히 자신의 분신인 자식들과 함께 하는 삶에는 절실한 소망이 없을 수 없다. 온통 황금빛으로 둘러싸인 가족 이미지에서는 세속적 욕망이 흘러넘친다. 작가는 굳이 그것을 감추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자신과 가족의 행복을 위한 부적 같다. 2011년 어떤 공적인 발표 자리에서 봤던 충격적인 여성의 성기 그림이 여성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부적 같았듯이 말이다.
빛나는 것에 대한 관심과 매혹에는 주술적인 것이 포함된다. 기복이나 주술이 고상하게 된 것이 종교인 것이다. 아이 밥그릇이 댕댕 울려 퍼지는 설치작품은 전업 작가로서 살아가는 자신을 매 순간 각성시킬 소리로 다가올 것이다. 숟가락과 밥그릇이 부딪히는 이미지와 소리는 일견 가벼우면서도 내용적으로는 무겁다. 명과 암이 함께 하는 역설은 그의 초기작품에도 선명하다. 금속성 표면에 대한 관심은 한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의 작품들을 연결 시켜 주는 형식적 고리가 되고 있다. 작가가 금속에서 주목하는 것은 묵직한 물성이기도 하지만, 그 반사면에서 보이는 것은 빛의 은유이다. 지상에 내리쬐는 빛은 중력으로부터 자유롭다. 지상의 존재에게 천상으로부터 비롯되는 빛은 승화나 초월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영지주의는 빛에 대한 선호를 정신적으로 설명한다. 천상에서 비롯된 인간은 다시 그곳을 그리워하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적 기원이 있기 이전에 우선 빛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성스럽게 여겨졌을 것이다. 조현익의 최근 작품에서 빛의 상징은 보다 물질적이다.
사랑이라는 미명아래 남/여의 극단적 대결적 의식이 감지되는 초창기 작업에서 빛에 반응하는 여성 또한 자연(물질)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연속성이 감지되기도 한다. 빛을 반사하는 금속은 미약한 빛 또한 확장성을 가지게 한다. 조현익이 자주 사용하는 광원은 촛불이다. 실제의 초는 아니고 한국의 중소기업에서 발명한 상품이다. 실제 초가 자연적 물질로 되어있다면 초의 시뮬라크르는 전기가 흐르는 플라스틱 주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법당이나 성당에서 신도가 헌금을 넣으면 불이 켜지는 촛불도 있다고 한다. 그 또한 성과 속이 일체화된 상황을 알려준다. 성/속 일체의 이미지는 성(聖)과 성(性)을 결합시킨 작품들에서 선명하다. 전시장 모퉁이에 연출된 무대는 포르노에 나올 법한 여성의 체위와 불상이 기괴한 기계음을 내면서 주기적으로 만나는 작품이다. 정통적인 교의에서는 배제된 종교적 전통에서, 종교적 법열과 성적 열락은 다르지 않음을 알려주는 작품이나 기록은 적지 않다. 그것은 결국 주체/객체의 구별이 사라지는 상황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을 말한다.
두 개의 성은 금기로 나뉘어있지만, 그러한 금기는 위반되곤 한다. 위반은 기괴함과 불온함을 낳았다. 이러한 생각이나 정서는 남성적 성이 승화와 관련된 것이고 여성적 성이 퇴행적으로 간주해온 가부장적 전통과 관련된 것은 아닌가 의심해 본다. 남성의 욕망을 끝없이 자극하지만 결국 그 욕망이 만족 될 수 없으므로 여성의 성은 부정적이다. 그래서 그녀의 성은 그자체로 죽음과 관련된다. 그것은 여성에 매몰되었을 때의 남성의 죽음이고, 욕망의 좌절이 폭력적으로 실현되었을 때의 여성의 죽음일 것이다. 이단적인 철학자 바타이유는 두 개의 성을 교차시킨 대표적 작가로 알려져 있다. 바타이유의 사고나 조현익의 작품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본다면 비판적인 대목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남성적 사유와 욕망을 끝까지 전개했다는 점은 인정돼야 할 것이다. 예술은 그러한 과도함을 통해 현실을 다시 보게 한다. 조현익의 작품에서 종교적 분위기를—비록 그것이 이교의 제단처럼 보인다 할지라도—연출하는 촛불은 여성의 성기의 이미지 또한 포함하는 이질적인 것이다.
동시에 얼마 전 한국의 촛불혁명이 그러했듯이 꺼질 수 없는 희망(그러나 꺼지지도 쉬운 희망)을 표현한다. 그것이 사적인 욕망과 관련된 것이든, 공적인 열망과 관련된 것이든 자신을 죽이면서 사는(또는 죽여야 사는) 역설은 공통된다. 조현익이 활용하는 인공 촛불은 안에 자석이 달려있어 무게 중심을 바꾸면서 마치 입김이나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인공 촛불은 하나 또는 여럿으로 조합되면서 메시지를 공중에 띄운다. 여러 개가 조합된 것은 마치 탑이나 기둥 같은 모습으로 확장되어 제의적 분위기를 북돋운다. 그 촛불들이 내밀한 공간을 밝히는 것이든 사회적 공간을 은유하는 것이든, 일단 하나로 서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하나하나가 모여 다수가 된다. 촛불에 관련된 가장 유명한 에세이 중의 하나를 쓴 철학자는 가스통 바슐라르이다. 그는 [촛불의 미학]에서 촛불의 불꽃은 조용하며 미묘한 생의 한 전형이라고 말한다.
바슐라르의 예지에 찬 표현을 직접 들어보자; ‘불꽃은 위쪽을 향해서 흐르는 모래시계다. 부서져 내리는 모래보다 가벼운 불꽃은 마치 시간 자체가 항상 무엇인가 해야 할 것처럼 그 형태를 쌓고 있다.’ 조현익의 ‘metamorphosis’전에서 변모는 시간의 축을 따라 일어나지만, 그것은 동시에 공간적으로 연출된다. 인공조명이기도 한 기계 촛불은 삶과 죽음을 켜짐과 꺼짐으로 구별한다. 지금은 촛불이나 램프를 켜놓고 몽상에 잠기던 바슐라르의 시대는 아니지만, 켜짐/꺼짐에 얽힌 생/사의 구별은 자연을 넘어 기계까지 포함되는 환경에도 적용된다. 산업혁명 시대를 넘어선 시대의 대표적인 기계인 컴퓨터는 이진법을 기초로 한다. 전자시대의 기계들은 on/off, 1/0의 차이에 의해 작동된다. 촛불에 내재된 수직성—‘불꽃은 직립하는 생명의 동적 요소’(바슐라르)이다—은 작동 중인 생명/기계의 상징으로 다가온다. 주어진 시간을 살아갈 뿐인 인간 또한 서서히 타는 촛불이다.
자연과 교감했던 낭만주의자들은 자연도 그렇게 보았다. 가령 [촛불의 미학]에 인용된 시인 노발리스는 ‘나무는 꽃 피는 불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슐라르는 불꽃은 켜기도 쉽고 끄기도 쉽다고 말하면서, 여기서는 삶과 죽음이 아주 나란히 놓여있다고 말한다. 촛불은 무엇보다도 죽음으로써 사는 역설의 구현체이다. 조현익은 삶과 죽음이 한데 얽힌 역설적 진실을 사랑에서 발견한다. 여성에 대한 사랑이든 신에 대한 사랑이든, 아니면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물신적 사랑이든, 그것은 언제나 주어진 경계를 흘러넘치는 것, 그래서 숭고한 것/비천한 것이다. 체액이 줄줄 흐르는 듯한 초기 작업부터 눈이 부시다 못해 아플 정도까지 번쩍거리는 황금빛 표면들이 있는 요즘 작품까지를 관통하는 것은 모두 적절한 선을 넘어선 과도함이다. 경계가 고수되면 변화는 불가능하다. 경계가 허물어진 상극은 화학반응을 일으켜 제3의 실체가 된다. ‘metamorphosis’라는 전시 부제는 연금술 같은 전통을 떠올린다. 연금술은 종교로 친다면 이교(異敎)나 비교(祕敎)에 해당하는 것으로, 동일성보다는 이질성에 관심을 가지는 예술과 더욱 가깝다.
작가는 두꺼운 금속판을 작업실 인근에 방치하여 자연스러운 변화를 각인시킨다. 오필리아나 메두사 같은 신화적 이미지를 가진 여인들이 새겨진 철판들은 나사로 조여지고 녹슬며 그 위에 회화적 액션이 더해져서 애증에 얽힌 강렬한 이미지로 거듭난다. 그녀들은 포로처럼 잡혀있으며 작가의 욕망이 투사된 행동의 무기력한 대상이 되고 있다. 정액을 뿌리면 정액을 받고, 피를 뿌리면 피를 받는다/또는 흘린다. 가학 피학적인 여인의 초상들은 아름다움의 정점에서 죽어가고 있으며, ‘사랑하는 대상이 결국은 주체의 은유’(크리스테바)라고 볼 때, 작가 또한 그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연인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타자의 끈적한 얽힘이 어둑한 공간 속 희미한 빛을 통해 드러난다. 전시장의 조명뿐 아니라 수많은 촛불들이 어둠을 밝히는 광원이 되고 있다. 연금술은 변모의 과학이자 종교이며, 여기에 성적인 은유는 강력하다.
귀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것저것 섞는 용기(容器)는 자궁과 비교된다. 모듈처럼 연결해서 거대한 평면으로 조합된 철판들은 이런저런 재료와 기구가 한데 얽히는 장이다. 거기에서는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영원과 순간이 뒤섞인다. 여러 가지 변성이 자연적으로 혹은 인공적으로 일어나곤 하는데, 조현익의 작업 속 철판들은 변성에 대한 은유이면서 실제이다. 연금술은 ‘화학반응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철학’(앨리슨 쿠더트)이라고 정의된다. 앨리슨 쿠더트는 [연금술 이야기]에서 변성은 생명의 필연성이며 연금술 용기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들은 거대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성이 미시세계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앨리슨 쿠더트에 의하면 연금술사들에게 변성이란 개인을 물리적 세계에 스며들어 있는 통상의 숙명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를 완전히 깨닫게 되는 초월적인 존재로 이끄는 것을 뜻했다. 조현익이 금속 및 금속성을 다루는 방식은 완전한 존재로의 변모를 꾀하는 연금술을 닮았다.
특히 이분법적 세계관, 정확히는 이분법 그 자체가 아니라, 양극의 극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기대치가 그러하다. 상극되는 둘이 만나서 발생하는 사건에 초점이 맞춰진다. 초기 작업에 강력했던 여성의 연금술적 분위기 또한 여성이 단지 금속에 구현되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연금술은 동양적 세계관에서도 친숙하다. 음양 사상이 그것이다. 앨리슨 쿠더트는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 그것은 도’라고 말하는 중국의 문헌을 인용한다. 그에 의하면 음은 무겁고 크고 어둡고 여성적이며 죽어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데 반해, 양은 그 반대의 성질들, 정교하고 가볍고 뜨겁고 남성적이며 강한 성질을 나타낸다. 조현익의 작품에서 여성은 음의 전형이며, 양은 음을 드러낸다. 오랫동안 이러한 음양의 원리에 따라 가족, 사회, 국가는 형성되어 왔다. 그것은 보편적이면서도 가속화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자체로 변모하고 있다.
그렇지만 반대되는 성이 만나 하나가 되고, 후세가 만들어지고 그 후세들이 날로 가속화되는 경쟁적 환경 속에서 먹고 살아야 사실은 기본적인 현실로 남아있다. 금속을 흉내 낸 휘황찬란한 배경 속의 천진한 가족 이미지나 기념비적으로 재현된 아이의 이미지에는 완전체가 되기 위한 무수한 시행착오들과 비극을 감수하며 변모를 꾀했던 기적에 관련된 이야기가 담겨있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여인의 이미지가 어두운 판본이라면 그다음 판본은 밝을 뿐이다. 밝음 뒤에 어둠이, 밝은 옆에 어둠이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 자체에 내재 된 잔인한 현실—[연금술 이야기]에는 ‘태아는 어머니 자궁(연금술의 용기이기도 함)에서 성장해 가지만 성장이 끝났을 때에는 자궁을 폭발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페트루스 보누스)는 말이 인용되어 있다—이 있는 것이다. 왜 남성의 작품에서 여성은 피 흘리고 죽어가는가. 특히 사랑하는 대상일수록!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연결을 강조하는 조현익의 작품 속 아이 또한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 어머니/여성을 부정해야 한다. 정신분석학은 여성이 부정되고 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이 상징적 우주로서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오랜 세월 동안 남성으로 간주되어왔던)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알에서 깨어나는 초기 작업과 후기 작업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더구나 가족과 함께 밝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작가로 변모시킨 이 또한 한 여성 아닌가. 그 점엔 전시실 초입에 제단의 형식으로 구현되어 있다. 이전 작업이 심각했다면, 요즘 작업은 가벼움을 포함한다. 특히 오브제가 적극적으로 도입되면서 가벼움이 많아졌다. 우리를 둘러싼 상품들은 최대한 가벼워지려고 한다. 조현익의 작품에 의하면 섹스에 관련된 사업이나 종교사업, 아이들의 장난감, 집 모든 것이 그렇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무게 중심은 언제나 있다. 작가는 변모라는 전시 개념을 통해서 십수 년간의 삶과 작업을 요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