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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믿음을 찾아서
임근혜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2016

<믿음의 도리>라는 제목의 개인전에서 처음 만난 작가에게서 그럴듯하게 들리면서도 해석에 따라 모순적으로 들리기도 하는 전시 제목만큼이나 진지하면서도 엉뚱한 면모가 엿보였다. 작품에 붙여진 파운드 오브제(교회 전단지)를 누군가가 떼어 갔다며 경찰에 신고하고 돌아오는 중이었던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분노와 황망스러움 그리고 이런 상황을 즐기는 듯한 여유로움과 함께 공존하는 듯 했다. 꽤나 긴 시간을 전단지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게 된 경위와 그것을 떼어갔을 관람객에 대한 추측성 발언-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이 이어졌는데, 신고를 받은 당직 경찰관은 작가의 이토록 진지한 태도에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런 사고 자체가 의미화될 수도 있겠죠”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작가의 태도를 운송도중 깨진 유리의 균열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히 발견한 일종의 레디메이드 요소로 여기며 즐긴 뒤샹이나 관람객의 참여(?)와 우연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해프닝적 발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일한 사물을 대하는 인식과 그에 상응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 ‘믿음’의 충돌과 흔들림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작가가 선택함으로써 전단지는 예술작품으로서의 새로운 가치를 부여 받고 전시되고 있었으나, 이를 가져간 이는 작가의 의도에 무지하거나 또는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임이 분명하다. 전시 중의 작품이 원래 상태를 유지하도록 관리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작가와 갤러리 측과 관람객 사이의 암묵적 또는 명시적 약속이 깨진 상황은 믿음의 문제를 다룬 전시 맥락을 종교적 신앙에서 인간간의 신뢰의 문제까지 확장시킨다.

작가가 아파트 우편함에 꽂혀있는 교회 전단지 문구에서 차용한 전시제목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관형격조사 ‘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믿음(믿는 자)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또는 ‘믿음이라는 도리’ 즉 ‘믿음이 곧 인간의 도리’라는 뜻 정도가 될 것이다. 문구의 출처가 교회 전단지임을 전제로 할 때 ‘믿음’이 기독교적 신앙을 가리키는 말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세속적 인간관계의 배반에서 비롯된 상처에서 유래한 주제를 오랫동안 다루어온 작가의 전작에 비추어 볼 때 ‘믿음’은 훨씬 포괄적 의미로 다가온다.

조현익의 전시는 믿음이 인간의 도리 즉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길’ 또는 절대적 가치라고 역설하기보다, 오히려 의심하고 경계하고 심지어 버릴 수도 있는 가변적 기준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전시장 입구에 걸려있는 자수와 붓글씨로 쓰여진 ‘일심,’ ‘인고 성실 근면’이라는 단어(<버려진 가훈 1, 2>는 가족 구성원이 일생을 지향해야 할 지상의 가치를 담은 가훈임에도 불구하고 창고나 길가에 버려진 채로 발견되어 전시장으로 옮겨진 것이다. 입구를 지나면 어느 교회 전단지의 표지에 아로새겨진 ‘믿음의 도리’라는 타이포와 이를 양 옆에서 나란히 호위하고 있는 ‘근조 화환’의 차가운 이미지가 전사된 세 개의 거대한 금속판이 압도적인 규모로 다가온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작인 이 작품들은 마치 ‘믿음의 종언’을 선언하는 듯하다. 아파트 우편함에 꽂힌 교회 전단지와 수평 수직으로 배치된 유골함은 마치 평생을 아파트처럼 규격화되고 일률적인 삶을 살다 가는 현대인의 삶의 단면을 대변하는 것 같다. 고대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다양한 식민지를 정신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다신교를 버리고 강력한 유일신인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하는 새로운 종교를 채택한 이래, 기독교는 전지구적으로 전파되어 해당 지역의 문화적 정치적 상황과 결합하여 지역화되어 왔다. 남한 땅에서 기독교가 가장 뜨겁게 퍼져나가던 시기가 바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경제부흥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전국민이 매진하던 1970-80년대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정치적 억압을 불사하고 앞만 보고 내달리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상당수는 현세의 믿음이 내세의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기본적 교리를 정신적 기조로 삼고 종교에 헌신했다. 이러한 신앙이 물질적 성장에 정신적 성숙이 뒤따르지 못한 근대화기의 아노미 상태에서 가치의 공백을 메워 주었고, 기도하고 헌금하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복락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구복신앙은 새마을 운동 시대의 희망찬 비전과 시너지를 발생시켰다. 종교가 이렇게 이데올로기적이라는 사실은 믿음의 맹목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믿음에 대한 의심 또는 회의는 종교적 신앙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흔히 학교에서 주는 상장이나 공직자의 임명장에 장식용으로 새겨진 봉황무늬가 내용 없이 텅 빈 금속판을 채우고 있는 작품은 국가적 권위나 국가가 주입해왔던 가치 즉 국가 이데올로기의 부재나 무의미함을 상징하는 것만 같다. 2016년 가을,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과 국정은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 공익을 위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상식을 처참히 짓밟은 최악의 ‘국정농단’ 사태는 온 국민을 국가라는 조직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지경까지 몰아갔다. 봉황의 흔적만 남은 텅 빈 화면은 이미 이전에 제작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최고 통치자가 스스로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마저 져버린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기에 너무나 적절한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과거 작품을 되돌아보니, 작업에서 가장 큰 부분은 종교나 국가 등 거대 시스템보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과 배신으로부터 비롯된 심리적 상처를 투사한 여인의 초상화였다. 순수한 소녀 같으면서도 요부 같은 모습과 죽은 듯 잠든 듯 생과 사의 경계 위에 있는 듯한 묘한 존재감, 그리고 캔버스 위에 흩뿌려진 붉은 물감은 폭력적인 제스처의 흔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장식성을 부여한다. 또한 포르노적 이미지와 종교적 도상을 차용하여 순수와 욕망, 삶과 죽음이라는 이중성 또는 양면성에서 성과 속을 혼재시킨 다양한 작업을 통해 작가는 꾸준히 절대적 가치와 믿음의 부재한 상황을 직면하려 애써온 것 같다. 연인에 대한 절대적 믿음의 상실은 종교적, 국가적 신념에 대한 회의와 부정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이렇게 불신의 범위가 확장될수록 그 느낌이 더 경쾌하고 밝은 이유는 무엇일까?

봉황 문양을 두른 표창장에 어린 아들이 말을 배우면서 서툴게 발음한 단어들을 채워 넣고, 벽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금속판에 기저귀 차림으로 밥그릇과 수저를 들고 서있는 어린 아들의 초상, 그리고 회전하는 밥상이 숟가락에 부딪혀 마치 장례행렬을 연상시키는 종소리 같은 음향을 만드는 <어머니와 나-기도> 등 황금색 액자와 벽지를 배경으로 한 일련의 작업들은 생과 사의 순환고리를 연상시키는데, 어두움으로 일관된 이전의 작업에 비해 희망적으로 보인다. 근대 사회의 복잡다단한 시스템이 강요하는 숱한 '믿음의 도리'의 허위성이 드러날수록, 생존과 공존이라는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가치에 다시 천착하게 되는 것은 위기의 시기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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