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성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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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콘-순교자(코숭이 공주)_2021_acrylic and oil on
7.조형연구-작동 Ⅱ_2021_acrylic and oil on line
6.조형연구-산_2021_acrylic and oil on linen_4
5.만찬(가장 배부른 식사) Ⅹ_2021_acrylic on canvas
만찬(가장 배부른 식사), 2020, wallpaper on canvas
3.이콘-순교자-엄마와 아가(기린과 파키케팔로사우루스) Ⅶ_2021_ac
2.이콘-순교자(코숭이 공주) Ⅱ_2021_acrylic and oil
이선영 (미술평론가) 2021

‘순교자들(Martyrs)’이라는 묵직한 제목 아래의 작품들은 아이 장난감들과 놀이하는 소재로 인해 가볍게 다가온다. 통상적으로 종교적 오브제가 키치화되어 있음을 염두에 둔다 해도, 아이가 놀이하면서 부숴놓은 장난감들이 ‘순교자’가 되려면 많은 전제와 맥락이 깔려 있어야 할 것이다. 육중한 철판에 진지한 이미지를 새겨오던 조현익의 작품 이력을 생각하면, 최근의 작품들은 경량 구조화되었다. 늘 자신이 당면한 현실에 솔직하게 상호작용해왔던 결과로 보여진다. 영상작품이 없을 경우 전시장은 더욱 밝아진다. 그라인더로 갈아낸 철판을 벽에 한가득 붙이던 작업을 대신하는 것은 중국 음식점 인테리어에 자주 등장하는 황금빛 벽지들이다. 바로크에서 키치로의 변모라고나 할까. 이 벽지는 빛을 머금는 물성을 가지며, 사진 이미지를 망점으로 변환시켜 출력하면 금박과 환영이 결합되어 렌티큘러같이 아른거리는 효과를 발휘한다. 황금빛 바탕은 무엇이 새겨져 있든지 잡으려 하면 저만큼 가 있다.

황금빛이 상징하는 풍요는 대다수의 인간들로서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황금빛 벽지는 빛을 발하는 금속성 재료에 대한 작가의 취향과도 관련되지만, 일상이라는 주제에서 축소되고 변주된 모습으로 가까이 두고 싶어 하는 키치적 사물로 나타난다. ‘순교자들’ 이라는 부제는 일단 누가 순교자인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누가 희생자가 될 것인가 팽팽한 대결의 장이었던 사랑과 죽음의 무대가 순진한 아이의 세계로 바뀌어 있지만, 이번 전시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성의 도상 또한 비천과 숭고를 넘나들던 여성상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적이다. 후자가 남성을 죽음에 이르는 고뇌에 빠트리는 수수께끼의 여인이라면, 전자의 경우에는 자신과 희생의 몫을 나누어지고 있는 삶 속의 마리아라고 해야 할까. ‘순교자들(Martyrs)’이라는 제목은 사뭇 달라 보이는 이전 작품과 요즘 작품의 관계를 종교라는 키워드로 결합시킨다. 조현익의 작업에서의 희생이라는 주제는 남녀 간의 사랑뿐 아니라 작업하는 삶에 내재한다.

이제 어린 자녀를 둔 아버지의 입장에서 희생의 진정한 면모는 육아에 있다는 현실적 각성이 요즘 작업에 반영되어 있다. 자신에게 당면한 것을 제쳐 놓은 초월은 가식적이다. 이러한 가식에 체화되지 않은 관념주의까지 가세되면 작품 자체가 위선적이 된다. 이때 예술은 힘없는 장식이나 빈약한 핑계가 된다. 육아란 남녀 간의 사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의 계산 불가능한 투입 과정의 연속들이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가정은 누군가 온전히 희생해야 작동하는 작은 사회이다. 육아는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관심을 두게 했다. 아이를 위해서 또는 부모를 위해서 소복이 담아놓은 밥이나 음식물의 이미지에는 성스러움이 느껴진다. 일상 대소사에서 먹는 문제의 중요함은 전통적 의례에도 선명하다. 신화나 종교가 중심을 이뤘던 시대에도 그 상징적 우주에는 리얼리즘이 있었다. 한편 탈종교화된 시대에의 현실주의에도 비합리적인 부분은 상당하다. 적절한 기능을 넘어서 끝없는 욕망을 부추기지 않으면 유지 자체가 불가능한 자본주의가 대표적이다.

성스러움에는 일상이, 일상에는 성스러움이 편재한다. 조현익의 현재 관심은 후자에 있지만, 성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가 완전히 일치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반복과 차이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이번 전시에는 공간적 조건 때문에 생략되었지만, 실제와 분리된 형상으로 공전(公轉)하는 그림자 영상이나 기성품에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내는 방식, 최초의 출발인 장난감이라는 복제물에 선명한 차이의 흔적들을 강조하는 작품들이 그 예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건져낸 ‘Neo Icon(새로운 성화)’ 시리즈가 회화, 설치, 벽화 형식의 평면 작품으로 나왔다. 이번 전시에서 아이의 놀이의 세계는 일상과 성스러움의 매개 고리가 된다. 놀이는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따로 잡아둔 세계’에서의 행위이다. 그것은 로제 카유와를 비롯한 인류학자들로 하여금 성스러움의 세계와 비교하게 했다. ‘놀이하는 사람’이라는 인류학적 개념을 정립시킨 저자 호이징가는 [호모 루덴스]에서 성(聖)-속(俗)-유희라는 하나의 서열을 규정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성(聖)과 유희는 둘 다 실제적인 삶에 대립 된다는 사실에서 결합된다.

유희 속에서 모든 사태들은 사람들이 그것에 부여하는 중요성만 가질 뿐이며, 사람들은 자신이 동의한 만큼만 연루되기 때문이다. 호이징가에 의하면 놀이에서는 위험조차도 선택된 것이다. 아이의 놀이에서 몰입도는 더욱 강해서 그 자체가 현실과 동일시될 정도이다. 인류학자들이 밝힌 바는 놀이에 규칙이 있다는 것, 그 규칙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놀이가 늘상 새로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미지만 등장하지만 영상과 결합하는 2020년의 작품은 빙글빙글 돌면서 되시작하는 놀이-희생의 과정이 그림자 유희로 나타난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어린아이는 순수하고 망각적이며 새로운 시작, 게임, 스스로 도는 바퀴, 최초의 운동, 신성한 긍정’이라고 하면서, ‘창조의 게임은 신성한 긍정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귄터 볼파르트는 [놀이하는 아이, 예술의 신 니체]에서 ‘도덕과 무관하게 변함없고 영원한 순진무구 속에서 생성하고 사멸하는 것, 형성하고 파괴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예술가와 아이들만의 특권’이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그 점은 인형을 산산조각 내며 놀고 있는 아이의 행위에서 조차 부정적인 것은 없음을 알려준다. 작품 속 분해되어 재조립된 인형은 기괴함보다는 해맑기까지 하다. ‘신성한 게임으로서의 세계’는 ‘선악의 피안에’(니체) 있는 것이다. 놀이하는 아이는 자연에 대해 문화가 성립되었을 때처럼 자기 주변을 조직하고 제어한다. 장 뒤비뇨는 [축제와 문명]에서 문화는 자연에 대항하는 상징적 힘의 총체로 정의한다. 근대인은 자연이 멀어지자 자연을 예찬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곤 하지만, 자연과 직접 대면하는 것은 동물 상태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의 문화 생성 과정은 아이의 놀이를 통해, 그리고 예술을 통해 개체발생으로 반복된다. 즉 놀이하는 아이에는 문화의 맹아가 발견되며, 이는 예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작가는 아이의 놀이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해서 작품에 활용했다. 아이의 성장은 빠르게 진행되는 것이어서 일과적이라는 점은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에 더욱 관심을 쏟게 했다.

이번 전시작품에 반영된 아이의 놀이는 텔레비전에서 본 영상을 모델로 해서 일종의 연극 속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아이는 미술은 물론 말을 배우기도 전에 자기 나름대로 말하며, 글을 배우기도 전에 나름대로 명명한다. 말하기 전에 억양이 있고, 문자 이전에 이미지가 있다. 의미가 명확해지기 전까지 아이의 말과 글은 일종의 행위로 나타난다. 어른의 세계에서 말이 그냥 말에 머물고 글이 그냥 글에 머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직관적 느낌에 충실한 아이의 행위는 난센스로 다가오지만, 작가의 눈으로 보면 꽤 설득력이 있다. 육아는 고된 과정이었지만 작가에게 신선한 충격 또한 주었다. 그 결과 최근 작품들에서 그동안 등장하지 않던 현란한 색깔이나 추상적 형태가 나왔다. 자신에게는 그렇게 멀고 힘들었던 방식을 아이는 너무 쉽게 해내는 것을 본다. 같은 크기로 제작된 [조형 연구] 시리즈는 아이가 놀이 중에 만들었던 것들로부터 시작한다.

아이가 접은 색종이를 그림자까지 재현한 작품이지만, 그 자체는 추상적으로 다가온다. 접은 대상을 화면에 붙이지 않고 굳이 그림으로써 ‘조형연구’라는 보다 분석적인 과정을 개입시킨다. ‘조형연구’ 뒤에 붙은 제목은 아이의 명명법이다. 아직 정해진 매뉴얼대로 접는 능력이 안 되어 나름대로 접는다. 종이접기든 역할놀이든 아이는 어떤 모델을 재현하고자 하지만, 능력이 안 되든 의지가 없든 결과는 예측불가하다. 아이는 모델을 자기 나름대로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차이와 반복의 놀이는 같음과 재현의 놀이를 대체’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놀이나 예술 모두에 적용되는 언명임을 아이의 놀이에 바탕한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형태도 그렇고 완성품에 대한 명명도 그렇고 어른은 이해할 수 없지만, 아이의 머릿속에 명명/사물의 연관 고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거기에는 정체불명의 대상을 분류하고 질서화 하는 아이의 상상이 있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처럼 말과 사물의 거리는 한없이 멀어져 있고, 그 사이의 공간에서 상상 실험이 행해진다.

작품 [조형연구-작동](2021)은 무엇을 접었는지 상상이 안 가는 형태에 붙여진 ‘작동’이라는 추상적 제목이 놀랍다. [조형연구-더 큰 작동] 여러 색의 종이가 겹쳐진 복합적 형태라서 ‘더 큰 작동’일까. [조형연구-엔더맨이 일하는 작동] 쯤에 이르면, 현대 예술가들이 추상화에 제목을 붙이는 과정과 유사한 과정이 드러난다. 그 밖에 [-산], [-감자], [-배], [-구두] 등은 미약하게나마 실제와의 연결고리가 느껴진다. 아이가 만들고 아버지가 연구한 형태를 보면, 뾰족한 부분이 있는 산, 노란색 감자, 날렵한 여성의 구두 등이 연상 된다. 아버지/어른/작가로서는 아이의 말랑말랑한 사고가 부럽기만 하다. 클라이브 브롬홀은 [영원한 어린아이, 인간]에서 행동의 유연성은 젊음의 가장 놀라운 특징 중의 하나로 꼽는다.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성숙해질수록 유연성을 잃어간다. 클라이브 브룸홀에 의하면, 유연성은 어린 동물들이 자연 속에서 살아남는 데 필수적이다.

유연성이 있어야만 다른 개체들의 행동을 모방할 수 있고, 대규모 집단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여러 행동의 사회적 뉘앙스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현익의 작품 속의 아이는 인생의 교훈이 담긴 어떤 이야기를 자기 나름대로 모방하면서 재연하는 놀이를 통해 성장하는 중이다. 2020년에 제작되고 발표한 [icon] 시리즈는 공룡을 업은 기린이라는 대표 이미지가 다양한 상황 속에 등장한다. 화려한 금박 벽지에 이미 존재하는 환상적인 공간감에 상상이 더해지며, 여러 작품을 놓고 보면 공룡/기린이 여기저기 다니는 모습처럼 보인다. 아이의 상상 속에, 그리고 아버지의 예술적 의미부여 속에 공룡과 기린은 서로를 의지한 채 세상을 헤쳐 나간다. 작품 [믿음의 도리-탄생]은 실제의 모델이 살짝 등장하며, 빛을 한 번 더 받는다. 유화로 그린 작품이 있으며, 작가는 하나의 출전을 여러 방식으로 반복한다. 복제는 상품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이미지의 기본적인 방식이다.

귀함과 유혹을 동시에 상징하는 황금빛은 상반되어 보이는 두 과정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전시장 입구 벽에 가득 붙여 마치 벽화처럼 보이는 작품 [icon: 순교자-엄마와 아가(기린과 파키케팔로사우루스) Ⅶ](2021)은 작은 장난감 이미지를 종교화처럼 크게 확대한다. 황금빛 배경과 야광과 원색의 물감 자국이 현란하다. 작은 작품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벽화 스케일로 확대된 이미지에서 기린의 다리 하나가 없는 사실은 선명하다. 초식공룡이기는 하지만 상대의 목에 걸쳐 있는 자세가 마치 사냥하는 듯한 육식동물처럼도 보이는 장면은 어미와 자식 간의 관계가 누군가 희생해야 하는 과정으로 다가오게 한다. 작년에 화성에서 선보인 비슷한 작품은 여기에 기린-공룡이 공전하는 이미지를 중첩시켜 더 극적인 효과를 주었다. 그 작품에서 환영으로서의 그림은 자신의 그림자를 현실 공간 속에 드리움과 동시에 자체적으로 운동한다. 희생이 따르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영원히 회귀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림자라는 시뮬라크르는 원본/복제의 이원 항으로부터 자율적이며, 그자체로 종교적 아이콘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황금색 벽지에 프린트된 [약사여래불](2020) 시리즈는 곰이나 토끼 등의 장난감이 결합된 아이의 약병 이미지를 통해 필요를 위해 유혹하는 가상을 표현한다. 이 물약병은 약사여래의 기운을 담고 있다. 어른이 돼서도 그냥 밋밋한 반창고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새겨진 반창고로 붙이면 더 보호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동서고금을 통해 종교는 치유를 약속한다. 엎어진 작은 의자 위에 여러 작품에서 복제되어 등장하는 ‘원본’ 장난감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놀이의 주인공일 법한 여자아이 인형이 놓여있는 설치작품 [순교자-엄마와 아가(엄마 까투리) Ⅷ](2021)에서 아이의 목소리는 사건 전개의 양상에 따라 격해지기도 한다. 인류사에 있었던 원형적 사건인 희생은 어린이용 프로그램에서, 아이의 놀이에서 반복적으로 재연된다. 물론 아이의 아늑한 놀이의 시공간 자체가 부모 희생의 결과이기도 하다.

[icon: 만찬(가장 배부른 식사)](2020) 시리즈에는 아이가 소꿉놀이용 장난감을 이용하여 아버지에게 차려준 밥상이 등장하는데, 종교는 누군가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행위를 의례의 차원으로 고양시키곤 한다. 캐롤 M. 코니한은 [음식과 몸의 인류학]에서 ‘옛날 영어에서 양육(foster)은 음식(food)을 의미한다’는 연구를 인용한다. 그에 의하면 모든 문화에서 음식은 특히 여성에게 중요한 관심사이고 상징물이다. 여자아이는 소꿉놀이를 통해 여성에게 주어진 상징계의 논리를 반복한다. 하지만 이제 요리는 남성도 하며, 육아활동 또한 부모 공동의 책임이다. 한편 누군가의 정성이 깃든 요리는 생존의 기능과 별개로 일상에서 심미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이며, 현대인의 SNS를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음식 사진들은 소통까지 담고 있음을 알려준다. 작가는 음식물로 가정된 이것저것이 놓인 접시에 유치찬란한 색상을 입혀 당시에 느꼈던 감정과 감동을 재연한다.

잘린 장난감 머리와 발을 바로 연결시켜서 놀고 있는 아이의 물건에 광배를 붙여준 작품 [이콘-순교자(코숭이 공주) Ⅱ](2021)는 귀여운 괴물이다. 어디서부터인가 잘려진 것들이 연결된 존재인 괴물은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탄생하는 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예쁜 인형이 기성의 상징계를 재현하는 대상이라면 괴물 같은 존재는 주어진 요소로 다르게 노는 아이-예술가의 상상력이다. 작가는 여기에 찬란한 빛과 색을 깔아 의미를 부여했다. 작품 [이콘-순교자(코숭이 공주)](2021)는 격렬한 몰입의 결과물인 산산조각 난 아이의 장난감 단편들을 모아놓았는데, 그것은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는 가운데 창의적인 조합이 발생하기도 하는 놀이의 과정을 보여준다. 어른들은, 특히 예술가 어른들은 그러한 과정을 ‘실험’이라고 부르곤 한다. 장 뒤비뇨는 [축제와 문명]에서 축제도 놀이의 규칙을 파괴한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축제는 혁명처럼 일상성을 전복하고 새로운 게임 원칙을 수립한다.

새로운 게임 원칙을 위한 투쟁은 아이의 놀이부터 예술가와 혁명가의 실천까지 적용된다. 로제 카이유와 또한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실험적 측면을 강조하는데, 그에 의하면 놀이란 현실과 거리를 두면서도 세계를 실험해 보는, 그래서 어떤 실제적이고도 치명적인 결과를 피해 간다. 작가가 관찰한 아이의 상상력과 함께하는 이 전시는 아이의 놀이가 ‘현존하는 현실 내의 다른 현실’(마르쿠제)이라고 명명했던 가상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예술과 중첩됨을 보여준다. 작가는 ‘최근 어린 아이(자녀)가 시시각각 벌이는 놀이의 소우주에서 잊혀졌던 조형적 감각을 되찾고 새로움의 마법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감수성을 퇴행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들뢰즈는 역행이라는 말로 퇴행을 대신한다. 근원으로 되돌아감은 새로 탄생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이기 때문이다.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영원회귀의 시간; 원형과 반복]에서 모든 창조는 가장 두드러진 우주 창조행위인 세계창조를 반복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벼락으로 쳐서 뱀의 목을 자르는 것은 무정형에서 형태로의 이행이라는 점에서 창조행위에 해당한다. 조현익은 아이를 통해서 근원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놀이를 통한 우주 창조행위의 반복이다. 엘리아데가 말했듯이 아득한 때로의 끊임없는 회귀를 통하여 지나간 시간을 무효화시키는 것, 즉 역사를 폐기하는 것이다. 역사는 어른의 세계처럼 단선적인 논리에 의거한 생산력을 중시한다. ‘새로움과 진보’는 역사주의의 대표적인 모토였다. 하지만 근대가 저물고, 인류는 그것만이 유일한 길은 아님을 자각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삶이 위협받을 때마다, 그리고 자신들이 보기에 우주가 소진되어 텅 빌 때마다 근원으로 회귀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신화나 제의에서는 시작, 기원적인 것, 원초적인 것을 의미하는 모든 것들이 매우 중요시된다. 이러한 회귀를 통해서 원초적 시간의 충만한 속에 편입된다. 그는 세계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우주창조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조현익이 2021년에 다시 호출하는 종교는 모든 것을 매 순간 다시 시작하는 놀이하는 아이에 기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