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익의 네오 이콘: 수행으로서의 예술, 놀이로서의 구원


Martyr-Mom%20and%20Baby(Giraffe%20%26%20Pachycephalosaurus)%20%E2%85%A6%2C%202021%2C%20acr.jpg)
![[포맷변환]1136-2.jpg](https://static.wixstatic.com/media/9c6f7c_7bfd41f5484347bfa66a6df89e4e2ae1~mv2.jpg/v1/crop/x_451,y_0,w_1098,h_1333/fill/w_210,h_255,al_c,q_80,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5B%ED%8F%AC%EB%A7%B7%EB%B3%80%ED%99%98%5D1136-2.jpg)
![[포맷변환]1129-2.jpg](https://static.wixstatic.com/media/9c6f7c_b40afdf6fdf14aa199cffb1159ad6153~mv2.jpg/v1/crop/x_0,y_191,w_1333,h_1619/fill/w_210,h_255,al_c,q_80,usm_0.66_1.00_0.01,enc_avif,quality_auto/%5B%ED%8F%AC%EB%A7%B7%EB%B3%80%ED%99%98%5D1129-2.jpg)

김노암 (아트스페이스휴 디렉터) 2026
1
조현익 작가의 이번 아트스페이스 휴 <네오 이콘 : 게임 모드> 전시는 지난 시기 다양한 주제와 표현형식으로 변화, 전개되어 왔던 과정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과정이란 소위 자연스러운 유기적 연결의 과정보다는 주제와 형식에 있어서 깊은 단절 또는 새로운 도약으로 보여진다.
아이들이 종이로 만든 장난감 총들이 다양한 형태와 채색으로 전시장을 채워놓았다. 방금 아이들이 떠난 자리를 보는 것처럼, 전시된 작품들은 소박하고 친숙한 재료와 표현으로 가득했다. 장난감 총을 만들고 울긋불긋 색을 칠하고 종이를 붙이고 엮으며 들썩였던 아이들의 파티가 끝난 후 아이들이 떠난 자리에서 우리는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기억은 사건과 이미지로 가득했지만 세상이 온통 따듯한 햇살로 채워졌던 그 순간을 결코 완전히 재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딘가에서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본 순간 생긴다는 우리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순수한 마음’이 바로 작가가 만나는 세계일지 모른다. 그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믿는다. 작가에게는 이것이 현재 세계 현실과 교묘하게 연결되어 버린다.
오래전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 반드시 칼싸움이나 장난감 총을 들고 전쟁놀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들끼리 서로 패를 만들고 죽고 죽이는 메타포로 가득한 승리와 패배, 희열과 고통을 몸으로 체험해야 비로소 어른이 되었을 때 타인에게 고통을 주거나 타인을 살해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잘못된 일인지 깨닫는다는 것이다. 책과 컴퓨터 게임과 같은 간접 체험으로는 결코 경험하지 못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릴적 마음과 몸으로 겪어낸 사람들만이 평화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독일의 문화이론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는 아이들이 버려진 물건(장난감)을 통해 세계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한다고 보았다. 벤야민의 ‘장난감’에 대한 아이디어는 조현익이 아이와 함께 만든 종이 총은 살상 무기가 아니라, 경직된 성인의 세계를 해체하는 미학적 도구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2
장난감을 갖고 노는 아이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독일의 철학자 실러(J.C.F. Schiller)가 말한 ‘유희 충동(Spieltrieb)’과 연관지을 수 있다. 놀이를 통한 ‘유희 충동’이란 인간의 감각적 충동(물질)과 형식적 충동(이성/형식)을 조화시키는데, 이는 미적 상태를 통해 전인적인 자유를 실현하게 하는 제3의 본성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감각과 이성의 분열을 극복하고 완전한 인격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이 '놀이'에 있다는 통찰과 궤를 같이한다. 이 놀이는 인류가 기억할 수 있는 한 가장 오래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제의’와 조우한다.
놀이와 제의와 같은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만나게 되는 독특한 영감과 통찰을 체득한다. 작가가 살아가고 경험하는 세계 또한 암묵적으로 또는 섬세하게 성(聖)과 속(俗)의 감각이 서로 간섭하고 있다. 가장 사적인 감각에서 그 반대편에 있는 극단의 숭고한 감각을 떠올린다. 작가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아무런 의미도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 평범한 일상의 생활 속에서 예술이 생성된다는 것을 상기한다. 그렇게 삶이 곧 예술이 되는 지점에서 현대미술의 존재론적 사유가 태어난다.
탄생과 성장, 성숙과 변화, 신과 죽음 그리고 타자들이 작가의 생활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거기에서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삶과 예술의 미분화’다. 작가에게 예술은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박제된 개념이 아니라, 사랑과 실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키우는 서사적 경험 그 자체다.
작가는 단순히 삶을 소재로 삼는 단계를 넘어, 삶 자체가 작품의 원천이자 목적, 그리고 방법론이 되는 경계 없는 예술 활동을 지향한다. 이는 “좋은 예술가란 사소한 것을 선택하여 기억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작가의 신념과 맞닿아 있으며, 거창한 담론보다는 일상의 감각을 숭배하고 기록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예술가’상을 정립한다.
3
작가는 매체의 경계를 두지 않는 유연한 태도를 보여왔다. 특히 초기 작업에서 주목한 ‘철’은 작가의 예술적 사유를 확장하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빛을 반사하고 머금는 동시에 붉게 녹슬어 소멸해가는 철의 물성은, 생성과 소멸이라는 인간의 숙명적 이원성을 상징한다. 철의 변화는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의 ‘비천함(L’informe)’ 혹은 ‘에로티즘’ 개념을 떠올린다. 작가는 창작을 일종의 수행으로 승화시켰는데, 여기서 작가는 바타유가 설파한 '성스러운 비천함'의 경계에 선다. 육중한 철의 부식은 파괴적이지만, 그 파괴를 통해 비로소 고정된 형식을 벗어나 숭고한 종교적 체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철은 청동기와 함께 인류가 역사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려준다. 사람들이 보다 복잡한 사회인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소수의 사냥꾼과 채집꾼들의 사회에서 수많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관계망의 복잡계의 사회로 진입한 인류의 무거운 고단함과 깊은 사념의 세계로 변화했다는 것도 증거한다. 철은 곧 문명의 특이점이자 가장 높은 수준의 사회성을 은유한다. 아니 은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청동기와 철기가 공존하던 시대의 예술가들의 고민과 통찰을 우리는 조현익 작가의 ‘철’의 작업에서 떠올릴 수 있다. 철과 욕망이 결합한 이미지는 작가 개인은 물론 독특한 인류가 만들어온 인류 자신의 자화상이다.
‘물성의 양가성’은 현대미술가들의 중심 화두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작가에게는 ‘철의 이원성’과 그것을 생활과 창작활동에서 길어올리는 ‘수행적 과정’이 중요해진다. 작가는 육중한 철판을 갈아내고 그 위에 거대한 여성의 이미지를 옮기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창작을 일종의 ‘수행’으로 승화시켰다. 메두사와 같은 신화적 도상을 제단 형태의 설치로 풀어낸 것은, 개인적인 욕망과 공포의 대상을 경외와 숭배의 대상으로 치환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몰입의 체험은 작가에게 예술이 곧 종교적 제의와 다름없게 된다.
4
작가는 특정 종교가 없음을 밝히면서도, 역설적으로 가장 종교적인 도상들을 끊임없이 호출한다. 무신(無神)과 무신(巫神)이 중첩하는 기이한 이미지의 힘을 보여준다. 소설 ‘죽음의 한 연구’에서 박상륭이 제시했던 기이한 세계, 이 세계과 저 세계가 중첩되는 중간계인 ‘유리(琉璃)’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캔버스 화면은 창도 문도 이미지의 집합도 아닌 작가가 바라보고 있는 시선의 이편과 저편 사이에 놓여있는 괴이한 공간이고 세계이다. 아마도 작가의 초기 작업의 어둡고 무거운 스타일과 질감은 ‘유리’라는 중간계의 독특한 중력과 세기말적 분위기와 어울린다.
작가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촛불’의 형상은 위로 타오르는 성스러움(聖)과 아래로 흘러내리는 비천한 속성(俗)이 한 몸을 이룬 인간 삶의 비유다. 작가에게 성스러움과 비속함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순환하고 공존하는 삶의 본질이다. 이러한 사유는 여행지에서 발견한 ‘상품화된 종교 기물’들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태국 사원의 부처상 곁에 놓인 누드 조각, 첼시 마켓의 성인 볼펜 등 성스러운 도상과 에로틱한 사물들이 매대에 나란히 놓인 풍경은 작가에게 민망하면서도 통쾌한 삶의 양면성을 일깨웠다. 작가는 이를 ‘사적(私的)인 사원’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종교가 뉴스로 대체되고 스포츠 스타가 신이 된 시대에 예술이 가질 수 있는 감동의 위상을 질문한다.
이러한 기물(奇物)들은 현실계에 속하지만 동시에 상상계로 도약하는 장치가 된다. 이러한 발상은 오래전 인류가 모두 신비주의자들이었던 시대부터 전승된 것으로 가장 원시적인 종교활동이나 기독교와 불교, 이슬람교와 같은 소위 고등종교 활동에서나 깊이 내재되어 있다. 많은 시인들과 화가들이 직관적으로 체득했던 바로 그 예민한 감각과 표현의 힘의 전통을 작가를 미술계에 알린 초기 작업에서 느낄 수 있다.
5
2015년 이후 작가의 작업은 ‘육아’라는 새로운 현실의 세계로 진입했다. 아이의 무의도적 사고와 반복적인 놀이의 순간에서 작가는 소우주를 발견하고, 그 사소한 의례 속에서 다시금 종교성을 포착한다. 이는 획일적인 사회 시스템과 고정된 인식의 틀을 아이와 같은 유연함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다. 엘리아데(M. Eliade)의 말처럼, 현대인이 무의식 속에 감추어둔 성스러움의 기억을 일상의 사물들을 통해 되살리는 것이 작가의 새로운 소명으로 자리 잡는다. 아이의 탄생과 성장 과정에 깊이 관여하는 ‘육아’는 일상을 신성한 시간으로 변화시킨다. 작가의 이러한 놀라운 경험은 이번 아트스페이스 휴의 전시에서 그대로 구체화되었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아이들이 예술가의 반열에 있다는 경험을 재현한다. 작가는 아이들과 함께 오브제를 만들고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한다. 아이들과 공동 제작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이전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예술이란 무엇이고 예술가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작가의 작품 세계는 성스러움과 비천함이 부딪쳐 발생하는 ‘섬광’을 쫓는 과정이다. 작가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인 ‘사원(私院)’은 창작이라는 의례를 거쳐 보편적인 숭고미를 간직한 ‘사원(寺院)’으로 재탄생한다.
그의 작업은 미술계에 데뷔한 초기부터 독특한 재료선택과 이미지, 분위기의 연출을 통해 세련된 개념으로 전유되어 왔던 현대 미술의 이미지를 변화시켜왔다. 우리 주변의 비속한 기물들을 낯설게 조합하여 성(聖)과 속(俗)이 교차하는 장을 마련한다. 관객은 낯설지만 익숙하고, 속되지만 신성한 우리 삶의 진짜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자신의 개인의 생활과 삶의 운동 속에 뚜렷한 흔적을 남김으로써, 예술이 우리를 어떻게 다시 ‘살게’ 하고 ‘믿게’ 만드는지를 다시 사유하라고 권유한다.